마법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묻던 동화 속 왕비가 2026년의 인공지능을 만난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곽현주 디자이너의 ‘곽현주컬렉션(KWAKHYUNJOO COLLECTION)’이 9월 5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아트홀 1관에서 열린 2027 S/S 서울패션위크에서 ‘MIRRORING’을 주제로 현실과 가상, 과거와 미래가 뒤섞인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

출발점은 동화 ‘백설공주’다. 왕비가 마법의 거울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는 모습과 현대인이 AI에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일상을 겹쳐놓았다. 서로 수백 년의 시간을 사이에 둔 두 장면이지만, ‘알 수 없는 존재와 대화하며 자신과 세상을 확인한다’는 점에서는 묘하게 닮아 있다. 곽현주는 이 두 세계를 클래식 테일러링과 빈티지, 레이스와 니트, 동서양의 장식, 미래적인 스타일링이 뒤섞인 옷으로 번역했다.

실제 런웨이에서 흥미로운 것은 ‘AI’를 기계적이거나 차가운 미래복으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낡은 책이 가득한 고전적인 서재를 연상시키는 무대 앞에 레이스와 브레이드 헤어, 진주와 주얼리, 오래된 듯한 텍스처의 옷이 등장했다. 미래를 이야기하면서 과거의 기억을 꺼내놓는 역설적인 풍경이었다.
레이스와 브레이드 헤어…미래를 ‘오래된 것’으로 표현하다
첫인상을 결정한 것은 여성복의 강한 레이어링이었다. 옐로와 그린, 실버가 희미하게 뒤섞여 빛에 따라 표정이 달라지는 크롭트 셔츠와 쇼츠에는 블랙 레이스를 덧댔다. 셔츠 밑단과 소매 끝, 쇼츠 아래로 검은 레이스가 살짝 드러나면서 클래식한 셔츠 앤 쇼츠가 전혀 다른 옷으로 변했다.

여기에 레이스 스타킹과 블랙 레그워머, 스트랩 샌들을 겹쳐 신었다. 머리는 길게 땋아 내리거나 양옆으로 둥글게 말아 올렸다. 여성적인 레이스와 다소 반항적인 스타일링이 한 몸에 들어왔다. 같은 소재의 크롭트 뷔스티에형 톱에는 블랙과 실버를 결합한 비대칭 하의를 매치했다.
한쪽은 블랙 원단이 골반을 감싸고, 다른 쪽에서는 비즈 장식이 들어간 투명한 소재가 드러났다. 허리에는 여러 줄의 체인과 장식을 늘어뜨렸다. 하나의 옷 안에서 감추는 부분과 드러내는 부분, 직선과 곡선, 불투명과 투명이 동시에 존재한다. 곽현주가 ‘MIRRORING’에서 말한 상반된 세계의 공존은 이런 방식으로 실제 옷에 나타났다.

정장에 레이스를, 트렌치에 파자마를…익숙한 옷을 비틀다
이번 컬렉션의 또 다른 축은 테일러링이었다. 베이지 숏 트렌치 재킷에는 스트라이프 와이드 팬츠를 매치했다. 재킷 자체는 더블브레스티드와 넓은 라펠 등 익숙한 트렌치의 문법을 따르지만, 아래로 내려가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여유롭게 떨어지는 스트라이프 팬츠의 밑단에는 화이트 레이스를 달았다.
비즈니스웨어와 잠옷, 아우터와 란제리의 경계가 한 룩에서 섞이는 듯한 효과다. 베이지 스트라이프 셋업 역시 마찬가지다. 볼륨 있는 반소매 톱과 비대칭 미니스커트에 긴 스카프를 목에 감고, 안에는 화이트 레이스 스타킹을 받쳤다. 여기에 오렌지빛 틴티드 안경과 여러 겹의 목걸이를 더했다.

정장용 스트라이프 소재를 사용하면서도 결과는 전형적인 오피스웨어와 거리가 멀었다. 반대편에는 몸에 밀착되는 크림 컬러 오픈워크 니트 미니드레스가 등장했다. 촘촘하게 반복되는 마름모 형태 사이로 피부가 비치고, 작은 장식들이 표면을 따라 흩어졌다. 같은 니트를 길게 늘여 베스트와 쇼츠로 만든 룩에서는 앞부분을 블랙 리본으로 묶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만들었다. 레이스와 니트의 ‘구멍’ 역시 이번 컬렉션에서는 거울처럼 안과 밖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치로 읽혔다.

남성복은 더 느슨해졌다…테일러링과 라운지웨어 사이
남성복에서는 클래식의 해체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다. 오프화이트 와이드 팬츠 위에 옅은 옐로 슬리브리스 톱을 입고, 그 위로 프린트가 들어간 가벼운 아우터를 느슨하게 걸쳤다. 머리에는 둥근 니트 혹은 크로셰 질감의 헤드피스를 쓰고 목에는 스카프와 펜던트를 길게 늘어뜨렸다.
여유롭게 흘러내리는 팬츠와 몸에서 떨어져 움직이는 아우터가 정장과 리조트웨어 사이를 오갔다. 반면 조직감이 강한 크림 계열 재킷은 훨씬 정제됐다. 허리 길이의 재킷에 장식적인 블랙 여밈을 반복하고, 화이트 와이드 팬츠와 스카프를 조합했다. 전통적인 재킷의 단정함에 동양적인 인상을 주는 여밈과 목 장식을 겹쳐놓은 모습이다.

롱 재킷과 쇼츠를 결합한 룩도 눈에 띄었다. 밝은 그레이의 길고 느슨한 재킷 안에는 식물 모티프가 들어간 톱을 입고, 카키 베이지 쇼츠와 로퍼, 핑크 삭스를 매치했다. 재킷의 격식은 쇼츠와 양말에서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그레이 그린 톱에 프린트 셔츠와 스카프를 레이어드하고 베이지 와이드 팬츠를 연결한 룩에서는 남성복 특유의 경직된 구조가 거의 사라졌다. 이번 시즌 남성복은 ‘남성적인 것’을 강화하기보다 여성복에 사용된 스카프, 주얼리, 프린트와 부드러운 소재를 공유하면서 하나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곽현주컬렉션이 지속적으로 보여온 남녀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타일이 이번 ‘MIRRORING’에서는 더욱 자연스럽게 작동했다. 앞서 공개된 브랜드 소개에서도 곽현주컬렉션은 그래픽 아트워크와 디지털 프린팅, 패치워크, 유동적인 실루엣을 활용하며 여성과 남성의 경계를 오가는 브랜드로 평가됐다.

올리브·베이지·크림…미래를 차가운 색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컬러에서도 일반적인 ‘AI 패션’의 공식을 비켜갔다. 메탈릭 실버나 블랙을 중심에 놓기보다 베이지와 크림, 아이보리, 옐로, 세이지와 올리브 그린 등 자연에서 가져온 듯한 색을 넓게 사용했다. 올리브 그린 슬리브리스 톱과 같은 계열의 비대칭 하의를 연결한 룩은 그 특징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준다. 몸을 따라 부드럽게 떨어지는 원단에 긴 스트링을 여러 방향으로 늘어뜨려 모델이 걸을 때마다 선이 움직였다.
오프화이트 바탕에 잔잔한 패턴을 넣은 셔츠와 볼륨 쇼츠의 셋업 역시 미래적인 옷이라기보다 오래된 사진 속에서 꺼낸 휴양복에 가까웠다. 곽현주는 여기에 크롭트 톱과 노출된 허리, 과장된 볼륨의 쇼츠, 메탈릭 액세서리를 결합해 빈티지를 현재로 이동시켰다. 보도자료에서 예고한 것처럼 자연 풍경에서 가져온 따뜻하고 밝은 컬러와 차분한 색조를 함께 배치하면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방식이다.

책을 들고 걷는 모델들…‘MIRRORING’의 또 다른 장치
이번 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 소품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책이었다. 여러 모델이 런웨이를 걸으며 한 손에 책을 들었다. 어떤 룩에서는 작은 골드 장식과 책을 함께 들었고, 남성 모델 역시 두꺼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등장했다. 거대한 서재가 펼쳐진 무대 영상과 책을 든 모델이 겹치면서 ‘지식’이라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여기에 브레이드 헤어와 오래된 서재, 고전적인 주얼리, 레이스가 과거의 세계를 만든다면, 그 모든 이미지를 디지털 스크린 위에 구현한 무대는 현재와 가상을 상징한다. 백설공주의 왕비가 답을 얻기 위해 마법의 거울을 찾았다면 현대인은 화면을 열어 AI에게 질문한다. 책과 거울, 그리고 AI라는 서로 다른 시대의 ‘답을 찾는 도구’가 하나의 런웨이 안에서 마주한 셈이다. 이는 보도자료를 넘어선 시각적 해석이지만, 실제 무대와 스타일링이 이번 시즌의 ‘MIRRORING’을 가장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했다.

레이스·주얼리·스카프…스타일링이 옷만큼 강했다
액세서리의 비중도 상당했다. 진주와 비즈를 연결한 초커, 여러 겹의 체인 벨트, 컬러 스톤 목걸이, 긴 펜던트와 브레이슬릿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작은 주얼리 하나만 사용하는 미니멀한 접근과는 정반대였다. 머리 역시 단순히 뒤로 넘기지 않았다. 여러 가닥으로 길게 땋거나 머리 양쪽을 둥글게 말아 올렸고, 니트 헤드피스와 베레를 더했다.
신발에는 레그워머와 양말, 레이스 스타킹을 겹쳐 신었다. 샌들 위로 양말을 올리고 다시 발목에 원단을 쌓는 방식도 보였다. 그래서 이번 컬렉션은 각각의 옷을 떼어놓고 볼 때보다 헤어와 주얼리, 양말, 신발, 책까지 한꺼번에 봤을 때 곽현주가 만들려 한 세계가 훨씬 또렷해진다.

‘마법의 거울’에서 AI까지…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비추다
곽현주가 이번 시즌 제시한 미래는 깨끗하고 완벽한 디지털 세계가 아니었다. 레이스는 조금 낡은 듯했고, 니트에는 손맛이 남아 있었으며, 테일러링은 일부러 느슨하게 풀렸다. 빈티지한 소재 옆에는 메탈릭한 장식이 놓였고, 동양적인 인상의 여밈과 서양식 재킷이 한 옷에서 만났다.
미래와 과거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그 때문에 ‘MIRRORING’이라는 제목은 단순히 거울에 비친 대칭을 의미하기보다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가 상대편을 비추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가까웠다. 이는 곽현주컬렉션이 지난 시즌부터 이어온 방식과도 맞닿는다. 브랜드는 2026 S/S에서 파도와 파동을 미래적으로 해석했고, 2026 F/W에는 한복 치마와 조각보의 레이어 구조를 현대적인 실루엣으로 풀어낸 바 있다. 이번에는 그 시선이 마법의 거울과 AI라는 서로 멀리 떨어진 두 세계로 향했다.

정승원의 목소리가 채운 피날레…패션과 음악으로 완성한 ‘MIRRORING’
런웨이의 마지막에는 또 하나의 장면이 기다리고 있었다. ‘팬텀싱어4’ 우승자인 가수 정승원의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면서 쇼는 일반적인 모델 워킹의 피날레에서 공연 무대로 확장됐다. 정승원의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가운데 모델들이 다시 런웨이에 등장해 길게 행렬을 이루며 마지막 워킹을 이어갔다. 음악과 패션의 결합이 피날레에서 완성됐다.

거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AI가 보여주는 답은 진짜일까. 과거의 기억과 미래에 대한 상상 가운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현실일까, 아니면 또 하나의 이미지일까. 곽현주는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레이스와 테일러링, 동양과 서양, 여성성과 남성성, 빈티지와 미래, 책과 AI처럼 서로 다른 세계를 한 런웨이에 세워 서로를 비추게 했다.
그래서 곽현주컬렉션의 2027 S/S ‘MIRRORING’은 AI를 옷으로 표현한 단순한 테크 패션이 아니었다. 오래된 동화에서 출발해 지금 우리가 AI와 맺고 있는 관계를 되돌아보고, 과거와 미래가 서로를 비추는 순간을 곽현주 특유의 자유로운 레이어링과 스타일링으로 풀어낸 ‘현대의 동화’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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