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트렌드는 없다.”
장광효 디자이너의 ‘카루소(CARUSO)’가 2027 S/S 서울패션위크에서 던진 메시지는 단호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패션의 속도에 올라타기보다, 오랜 시간 축적해온 자신의 디자인 언어를 다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었다.
이번 컬렉션의 주제는 ‘There Are No New Trends(새로운 트렌드는 없다)’. 장광효 디자이너는 새로움을 만들기 위한 변화보다 시간이 만들어낸 가치에 집중했다.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내고 봉제의 정교함과 소재의 질감, 몸을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는 실루엣을 다시 전면에 세웠다.

하지만 런웨이는 결코 보수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카루소가 오랜 시간 다뤄온 남성복의 익숙한 문법을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새로운 표정을 만들어냈다. 클래식 슈트와 트렌치코트, 셔츠와 넥타이 같은 전통적인 남성복의 요소들은 데님과 시스루, 강렬한 컬러, 과장된 플랫폼 슈즈와 만나 예상 밖의 장면을 만들었다.

‘새로운 것’ 대신 ‘잘해온 것’을 다시 바라보다
이번 컬렉션의 중심에는 역시 테일러링이 있었다. 베이지 더블브레스티드 슈트는 장광효의 남성복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줬다. 몸의 선을 따라 정교하게 떨어지는 재킷에 광택이 도는 라펠을 더하고, 스트라이프 셔츠와 여러 겹의 타이를 매치했다. 여기에 정통 드레스 슈즈 대신 밝은 컬러의 스니커즈를 신겨 클래식의 긴장을 풀었다.

블랙 롱 재킷과 연한 그린 팬츠를 조합한 룩 역시 같은 맥락이다. 길게 뻗은 재킷과 날카로운 라펠은 정통적인 남성복의 형태를 유지하지만, 높은 허리선의 팬츠와 예상 밖의 컬러가 전형성을 걷어냈다.
카루소가 이번 시즌 말하는 ‘새로운 트렌드는 없다’는 결국 과거로 돌아가겠다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이미 충분히 익숙한 것을 어떻게 다시 보느냐가 새로운 디자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가깝다. 그 태도는 베이지 트렌치코트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넉넉한 트렌치코트 아래 같은 계열의 와이드 팬츠를 배치한 룩은 장식을 거의 걷어내고 실루엣 자체에 집중했다. 소매를 자연스럽게 걷어 올리고 허리를 느슨하게 묶으면서 코트와 팬츠가 걸음에 따라 움직였다.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정교함을 과시하지 않는 옷이었다.

슈트를 자르고, 셔츠를 풀고…남성복의 비례를 흔들다
장광효는 클래식을 지키는 동시에 그 클래식의 비례를 적극적으로 흔들었다. 베이지 더블브레스티드 재킷의 소매를 과감하게 제거하고 길이를 짧게 자른 베스트형 재킷에는 화이트 셔츠와 타이를 결합했다. 상체는 전형적인 포멀웨어처럼 보이지만 아래에는 길게 늘어진 화이트 소재와 팬츠를 겹쳐 입혀 전혀 다른 실루엣을 만들었다. 허리에는 벨트 대신 넥타이를 두르듯 묶어 남성복의 익숙한 소품을 새로운 위치로 옮겼다.

넥타이는 이번 컬렉션을 읽는 재미있는 장치 중 하나였다. 스트라이프 셔츠에 커다란 보타이와 긴 타이를 동시에 매치하고, 허리 주변에는 서로 다른 패턴의 여러 타이를 길게 늘어뜨렸다.
여기에 비대칭으로 해체된 듯한 데님 하의를 결합했다. 오피스웨어의 상징과도 같은 넥타이가 단정함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움직임을 만드는 장식으로 변했다. 데님 역시 평범하게 사용하지 않았다. 익숙한 블루 데님을 비대칭적으로 자르고 길이를 달리하면서 스커트와 팬츠의 경계를 흐렸다. 걸을 때마다 여러 패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정적인 테일러링과 대조를 이뤘다. 카루소가 오랫동안 보여준 남성복의 유희적 감각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시스루와 도트, 남성복에 들어온 가벼운 긴장
소재가 바뀌자 남성복의 표정도 달라졌다. 블랙 도트가 촘촘하게 놓인 투명한 소재의 톱은 상체를 그대로 비치게 했다. 볼륨을 크게 잡은 소매와 목을 감싸는 스카프형 디테일 아래 넉넉한 블랙 팬츠를 매치했다. 구조적인 팬츠와 가볍게 떠 있는 상의가 대비되면서 남성복에서 쉽게 만나기 어려운 섬세한 긴장감이 만들어졌다.

또 다른 룩에서는 몸에 밀착되는 스카이 블루 계열의 프린트 톱과 같은 계열의 팬츠를 연결했다. 여기에 형광에 가까운 그린 허리 디테일과 브라운 패턴 타이, 핑크·옐로·블랙 등이 섞인 토트백을 더했다. 이런 스타일링은 이번 컬렉션이 단순히 ‘기본으로 돌아간 컬렉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장광효가 말하는 본질은 장식을 모두 없애는 미니멀리즘이 아니라, 자신이 구축해온 남성복의 문법 가운데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다시 조합할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었다.

베이지에서 민트·라임·블루까지…컬러가 바꾼 클래식의 온도
컬러 팔레트도 흥미로웠다. 베이지와 카멜, 화이트, 블랙 등 클래식 남성복의 기본색이 컬렉션의 중심을 잡았다면, 런웨이 곳곳에서는 민트와 라임 그린, 스카이 블루, 선명한 터키석 계열의 블루가 강하게 치고 들어왔다.
특히 블랙 테일러드 재킷 안에 광택감 있는 블루 계열 집업 톱을 입고 강렬한 블루 팬츠를 매치한 룩은 색 하나만으로 전통적인 재킷의 인상을 완전히 바꿨다. 무채색과 뉴트럴 컬러에 머무르지 않고 선명한 색을 정확한 위치에 배치하면서 클래식 남성복 특유의 무게를 가볍게 끌어올린 것이다. 이번 시즌의 컬러는 옷 전체를 장악하기보다는 실루엣 사이에서 불쑥 등장한다. 그래서 강렬하지만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다.

플랫폼 슈즈와 거대한 모자…스타일링에도 카루소의 위트
신발과 액세서리는 절제된 테일러링과 반대로 상당히 적극적이었다. 가장 반복적으로 등장한 것은 두툼한 앞코와 높은 볼륨을 가진 플랫폼 슈즈다. 화이트와 블랙, 브라운 계열 플랫폼을 와이드 팬츠나 크롭트 팬츠에 연결하면서 하체의 비례를 의도적으로 과장했다.
반면 정제된 베이지 슈트에는 스니커즈를, 해체적인 데님 룩에는 블랙 부츠를 매치했다. 옷의 격식과 신발의 격식을 일치시키지 않는 방식이다. 거대한 챙과 높은 크라운이 하나로 이어진 조형적인 모자도 시선을 끌었다. 얼굴 대부분을 가릴 만큼 과장된 모자는 스트라이프 오버사이즈 셔츠와 와이드 팬츠에 결합돼 하나의 오브제처럼 기능했다. 그래픽 패턴의 토트백과 멀티컬러 스트라이프 백 역시 실용적인 액세서리이면서 동시에 컬러를 끌어들이는 장치가 됐다.
결국 장광효가 이번 시즌 보여준 것은 ‘새로운 옷’이라기보다 익숙한 옷을 다시 입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1987년부터 이어온 카루소, 시간 자체가 디자인이 되다
이번 컬렉션을 이해하려면 장광효와 카루소가 지나온 시간을 빼놓기 어렵다. 무대 뒤 대형 스크린에 등장한 ‘CARUSO CHANG KWANG HYO since 1987’이라는 문구는 이번 시즌의 메시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장광효는 오랫동안 한국 남성복에서 테일러링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남성성에 대한 고정된 관념에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왔다. 강한 어깨와 정교한 재킷, 셔츠와 타이라는 남성복의 기본 위에 컬러와 장식, 부드러운 소재와 과장된 비례를 집어넣는 방식은 카루소가 구축해온 독자적인 언어다. 이번 시즌 역시 완전히 다른 장광효를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소개 자료에서 밝힌 것처럼 ‘새로운 시도를 위한 변화’보다 오랫동안 지켜온 기준을 다시 분명하게 드러내는 쪽을 선택했다. 화려함보다는 완성도, 디테일의 과시보다는 옷 자체의 본질에 무게를 뒀다. 그래서 ‘There Are No New Trends’라는 제목은 트렌드를 거부한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시간을 견뎌낸 디자인에 대한 자신감으로 읽힌다.

25년 함께한 고 ‘정소미 감독’에게 바친 특별한 시간
이날 쇼에는 옷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또 하나의 시간이 있었다. 카루소는 지난 25년 동안 컬렉션 연출을 함께해온 더모델즈의 고 정소미 감독에게 이번 무대를 통해 깊은 감사의 뜻을 전했다. 쇼가 마지막을 향해가던 순간, 대형 스크린에는 정 감독을 기리는 영상이 흘렀다. 영상에는 오랜 시간 카루소의 무대를 함께 만들어온 순간들이 차례로 등장했다. 패션쇼 현장과 런웨이의 기억, 장광효 디자이너와 함께했던 모습들이 화면 위에서 다시 이어졌다.

수많은 컬렉션을 함께 만들어온 두 사람의 시간이 한 편의 기록처럼 지나갔다. 단순한 추모 영상이라기보다 카루소라는 브랜드의 역사를 무대 뒤에서 함께 만들어온 동료에게 보내는 감사에 가까웠다. 특히 이번 컬렉션의 메시지와 겹치면서 그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옷은 시간이 지나며 깊이를 얻고, 경험은 기준이 된다.”
컬렉션 소개 자료에 적힌 이 문장은 이날만큼은 옷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한 사람, 수없이 반복된 무대와 그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 역시 카루소를 만들어온 또 하나의 자산이었다. 추모 영상이 끝난 뒤 쇼는 다시 런웨이로 돌아왔다. 모델들이 무대에 함께 등장하는 컬렉션 피날레가 이어졌고, 장광효 디자이너도 무대에 나서 관객들에게 인사를 전하며 2027 S/S 쇼를 마무리했다.
결국 이날 카루소가 보여준 ‘새로운 트렌드는 없다’는 선언은 과거에 머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새로움만을 좇지 않아도 옷은 다시 새로워질 수 있고, 시간이 쌓일수록 디자인은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브랜드를 완성하는 것은 옷만이 아니라 그 옷을 함께 만들어온 사람과 경험, 기억의 축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장광효의 2027 S/S 카루소는 그래서 새로운 트렌드를 보여주기 위한 컬렉션이 아니었다. 40년 가까이 축적한 자신의 언어를 다시 꺼내 지금의 방식으로 입힌 컬렉션이자, 그 시간을 함께 만든 사람에게 감사하며 다음 시간을 향해 걸어간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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