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지난 12월 단행한 2023년 그룹 정기 임원 인사에 경제계의 이목이 쏠린다. 글로벌 경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과감한 인적 쇄신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재계 안팎에선 롯데가 이번 인사를 통해 젊은 리더십을 전면 배치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외부인사를 기용하는 방식으로 그룹 전체에 큰 변화를 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성과를 낸 CEO 등 실적 중심에 무게를 둔 인사를 단행했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12월 15일 지주와 계열사 이사회를 열고 이런 내용의 2023년 정기 임원 인사를 확정했다. 가장 눈에 띄는 인사는 그룹 모태인 롯데제과 대표에 외부 인사를 수혈한 점이다. 이창엽 전 LG생활건강 사업본부장을 내정했다. 롯데제과 대표에 외부인사가 선임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창엽 대표는 한국 P&G를 시작으로 초콜릿 브랜드 허쉬 한국 법인장, 한국코카콜라 대표 등을 역임한 글로벌 마케팅 전문가다. LG생활건강의 미국 자회사인 ‘더 에이본 컴퍼니’ 대표로 북미 사업을 이끌며 소비재 분야에 대한 경력도 쌓았다.
롯데제과가 지난해 7월 롯데푸드와의 합병을 진행한 만큼 변화보다는 안정을 택할 거란 전망이 다수였지만,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선택은 ‘혁신’이었다. 이미 2022년 인사를 통해 50년 간 이어 온 롯데 순혈주의를 깨고 외부 전문가를 대대적으로 영입한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올해에도 파격적인 선택을 단행했다. 이 신임 대표의 진두지휘 아래 롯데제과는 롯데푸드 제품의 글로벌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롯데멤버스의 대표이사도 외부 여성 인사가 선임됐다. 삼성전자와 KT를 거친 빅데이터 전문가인 신한은행 김혜주 상무가 영입돼 그룹 내 첫 외부인사 출신의 여성 대표라는 수식어를 갖게됐다. 롯데는 지난 2018년 1월 인사에서 그룹 내 첫 여성 CEO를 발탁한 이후 여성 임원을 지속해서 늘려왔다.
업계에선 김 신임 대표가 롯데그룹이 보유한 고객 데이터를 활용해 새로운 시각의 비즈니스를 발굴하고, 디지털 혁신을 이끌어 롯데멤버스의 역량을 강화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 한층 젊어진 롯데, 40대 CEO에 신임 임원 중 40대 46%
젊은 인재들의 승진·발탁도 이번 롯데 인사의 특징이다. 롯데지주 ESG경영혁신실 이훈기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 50대 사장에 올랐다. 이 사장은 1967년생으로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다. 1990년 호남석유화학으로 입사해 2010년 롯데케미칼 타이탄 대표이사, 2019년 롯데렌탈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롯데지주 ESG경영혁신실과 롯데헬스케어를 이끌고 있다.
특히 롯데헬스케어, 롯데바이오로직스를 2023년에 연달아 출범시키고, 미래 먹거리 발굴을 위한 인수합병(M&A)을 성공적으로 이끈 점이 이번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LG생활건강 출신인 이창엽 롯데제과 대표(왼쪽), 신한은행 상무 출신의 김혜주 롯데멤버스 대표.
이번 인사로 롯데그룹 대표급의 전체 평균 연령은 1년 젊어 졌고, 사장 직급은 3년 내려갔다. 신임 임원 중 40대는 46%에 달한다. 1978년 이후에 태어난 40대 초반 신임 임원도 4명 나왔다. 지난해 6월엔 롯데바이오로직스 첫 대표 이사로 롯데지주 신성장2팀 이원직 상무가 전격 선임되면서 롯데의 40대 CEO 시대를 연 바 있다.
내부 전문가의 전략적 재배치도 이뤄졌다. 글로벌 경기 침체 등 경영환경이 악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해 변화보다는 안정에 방점을 두기 위해서다. 롯데면세점 대표이사, 롯데홈쇼핑 대표이사에 각각 김주남 전무(전 롯데면세점 한국사업본부장), 김재겸 전무(전 롯데홈쇼핑 TV사업본부장)가 내정됐다.

유동성 위기를 겪는 롯데건설은 지난해 긴급 투입된 박현철 롯데건설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켰다. 시장 불안을 해소하고, 현안을 해결하는데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이완신 롯데홈쇼핑 대표는 그룹 호텔군 총괄대표와 롯데호텔 대표이사로 내정됐다. 호텔의 마케팅 역량과 고객 관점 시각으로 세계적 호텔 체인으로의 사업변화와 혁신 동력을 키울 전망이다. 그룹 호텔군 안세진 총괄대표는 그룹의 싱크탱크인 롯데미래전략연구소장으로 이동해 그룹 전체의 미래 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전략 수립에 집중한다. 이영구 롯데제과 사장은 제과 대표이사를 떼고 식품군 총괄대표 업무만 맡게 됐다.

희망퇴직이 진행되고 있는 롯데하이마트의 새 선장엔 남창희 롯데슈퍼 대표를 앉혔다. 강성현 롯데쇼핑 마트사업부 대표가 쇼핑·슈퍼사업부 대표를 겸임하게 되면서 마트와 슈퍼의 업무 프로세스를 통합하는 업무를 맡는다.
아울러 롯데를 이끌었던 고위임원 3명은 그룹의 새로운 도약과 변화를 위해 일선에서 용퇴한다. 롯데지주 대표이사 송용덕 부회장, 롯데렌탈 대표이사 김현수 사장, 롯데건설 대표이사 하석주 사장은 약 35년 이상 몸 담았던 롯데를 떠난다. 박찬복 롯데글로벌로지스 대표는 재신임을 받았다. 박 대표의 유임 배경에는 실적 호조를 꼽았다. 박 대표는 2017년에 롯데로지스틱스(전신)의 대표이사직을 처음 맡은 이후 지금까지 수장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 인적 쇄신으로 ‘뉴롯데’ 추진, 장남 신유열 상무 승진

대대적인 인사 혁신 중에서도 가장 주목을 받았던 건 신동빈 회장의 장남 신유열 롯데케미칼 상무보의 상무 승진이다. 신 상무는 글로벌 네트워크 역량과 신사업인 수소 에너지, 전지 소재 관련 발굴 공로를 인정받아 승진 대열에 올랐다.
신 상무는 2020년 일본 롯데에 부장으로 입사했지만 그간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며 조용히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서서 아버지 신 회장과 함께 공식 석상에 등장하면서 그룹 차원의 승계 작업이 본격화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고개를 들고 있다. 초고속 승진으로 정식 임원 자리에 오른 신 상무의 경영 승계 작업에 더욱 힘이 실리고 있는 모습이다.
롯데그룹은 이번 임원인사 시기를 예년보다 3주가량 늦췄다. 대내외 불확실성이 커지자 신 회장이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하게 고민해 인사를 결정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유동성 악화에 따른 위기설이 대두되고 있는 만큼 그룹 쇄신을 위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과감한 결정을 내린 것으로 풀이된다. 이번 인적쇄신을 통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이 강조하는 ‘뉴롯데’를 만들어 갈 동력이 생길지가 관건이다.
그만큼 롯데그룹 앞에 놓여있는 과제가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유동성 위기가 심각하다. 지난해 9월 말 강원 춘천 레고랜드발 자금 경색의 직격탄을 맞았다. 강원도가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통해 레고랜드를 건설한 공기업의 지급보증을 섰는데도, 김진태 강원도지사의 결정으로 해당 공기업의 회생을 신청하면서 채권시장에 자금 경색이 시작됐다.

롯데건설의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이번 인사에서 지난해 투입된 박현철 롯데건설 사장을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이 때문에 도급순위 8위(2022년 기준) 롯데건설이 순차적으로 만기가 도래하는 PF 차환이 갑자기 어려워지면서 단기 유동성 위기를 맞았다. 롯데건설은 지난해 10월 2000억원의 유상증자를 단행했는데, 롯데건설 주요 주주인 롯데케미칼(879억원)과 호텔롯데(861억원), 롯데알미늄(199억원) 등이 지분율에 따라 투자를 단행했다.
롯데케미칼은 이와 별도로 롯데건설에 5000억원의 단기자금도 빌려줬다. 현재 롯데케미칼이 일진머티리얼즈 인수에 필요한 2조7000억원을 마련 중인데 이 가운데 1조7000억원은 대출로 메울 예정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롯데건설의 유동성 위기가 심각하다는 방증이다.
롯데케미칼의 자금 지원도 부족했는지 롯데건설은 지난 11월 롯데정밀화학과 롯데홈쇼핑에서 각각 3000억원과 1000억원을, 하나은행과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서 2000억원과 1500억원을 빌리기로 했다. 총수까지 직접 진화에 나섰다. 신동빈 롯데 회장이 11억여원의 롯데건설 지분을 사들이며 시장의 불신을 불식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하지만 롯데건설 외에 문제도 있다. 나이스신용평가는 롯데케미칼, 롯데지주, 롯데렌탈, 롯데캐피탈의 장기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 조정했다. 실적 부진을 이어오더니 급기야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롯데하이마트를 두고는 여러 신평사들이 등급 전망을 끌어내렸다.
코로나19 팬데믹 영향으로 최근 3년간 전례 없는 위기를 겪고 있는 롯데면세점 역시 경영 상황이 순탄치 않다. 위기 극복을 위해 사업 구조를 개편하고 해외 사업을 확장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해왔지만, 그간 펼쳐온 국내 다점포 전략 수정과 체질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에 따라 희망퇴직을 받기도 했다.
◇ 충분한 자산 갖춰 유동성 위기 불식, 주력 유통사업 성장세

롯데건설이 크게 흔들릴 만한 당장의 이슈는 없다는 분석이다. 롯데건설의 우발부채로 추산되는 금액은 6조∼7조원 가량이지만, 그룹 전체의 현금성 자산은 15조원이 넘어서는 수준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재계의 관측이다.
이번 인사단행은 이러한 글로벌 경기침체와 자금시장 경색에 맞서 성장 모멘텀을 모색하겠다는 신동빈 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반등의 열쇠는 유통사업에 있다. 주력 계열사인 롯데쇼핑이 엔데믹 영향으로 회복세를 보이며 예상치를 웃도는 실적을 거두고 있고, 롯데쇼핑은 지난해 3분기 연결기준 영업이익이 1501억원으로 전년 대비 419% 증가했다. 매출은 4조133억원으로 전년보다 0.2% 증가했다.
백화점은 3분기 매출이 7689억원으로 17% 증가하고, 영업이익은 1089억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마진율이 높은 패션 수요가 증가하면서 영업이익 개선 폭이 컸다. 롯데마트는 매출이 5% 증가한 1조5596억원, 영업이익은 179% 증가한 325억원을 기록했다. 가공식품과 주류 중심으로 판매가 좋았던 데다, 리뉴얼한 제타플렉스 점포의 성장이 본격화한 영향이다. 슈퍼 역시 점포 효율화를 통해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증가했다.
재계 관계자는 “금리 인상과 경기 위축에 따라 소비 심리가 크게 꺾이고 있는 점은 향후 롯데쇼핑 실적에 부담 요소지만, 대규모 쇄신 인사가 이뤄진 만큼 달라진 경영 행보를 보일 것”이라면서 “소폭으로 이뤄질 것으로 점쳐졌던 임원인사에 큰 변화가 일어난 것만으로도 평소 신 회장이 강조한 변화와 쇄신이 실제 그룹 내에서 속도감있게 실행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