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오후 판교나 광교의 백화점 명품관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고, 캐리어를 끄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명동 거리의 올리브영 매장 앞에 길게 늘어선다. 언뜻 무관해 보이는 두 풍경은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올해 하반기 백화점 업계에서 유독 자주 오르내리는 이름이 두 개 있다. ‘반도체 성과급’과 ‘방한 외국인’이다. 하나는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만들어낸 두둑한 보너스이고, 다른 하나는 사상 최대 속도로 밀려드는 외국인 관광객이다. 내수 소비심리 자체는 여전히 완전히 살아나지 않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이 두 갈래의 외부 소득과 구매력이 유독 백화점과 면세점 등 특정 유통 채널로 몰리고 있다.
문제는 이 훈풍이 유통업계 전반으로 번질지, 아니면 일부 채널에 국한된 반짝 특수로 끝날지다. 최근 증시 급락이라는 변수가 등장하면서 그 답에는 다시 물음표가 붙는다.

시작은 반도체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약 47조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이를 3만 4000여 명의 임직원에게 나누면 1인당 평균 성과급이 13억원에 달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백쿼리증권은 SK하이닉스 직원 1인당 평균 성과급이 최대 12억 9000만원에 이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세금과 4대 보험료를 떼면 실제 수령액은 6억 원대로 줄어들지만, 그래도 웬만한 서울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할 수 있는 규모다. 삼성전자도 반도체(DS) 부문 직원 1인당 약 1억 8723만 원의 성과급에 더해, 영업이익의 10.5%를 재원으로 하는 특별경영성과급을 자사주로 지급하기로 하면서 일부 임직원은 최대 6억 원 안팎의 보상을 받게 됐다.
이 온기는 원청에만 머물지 않고 생태계 전반으로 번졌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장에서 무사고를 기록한 협력사에도 사상 최대 규모의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지급 대상을 2차 협력사까지 확대했다. 대기업 정직원의 성과급이 명품 소비로 이어지는 동안 협력사 임직원의 인센티브 역시 같은 소비 생태계 안으로 흘러든다는 뜻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의 결실이 원청 대기업을 넘어 공급망 전반으로 퍼져나가는, 말 그대로의 낙수효과가 이 대목에서 확인된다.

◇ 판교 등 반도체 기업 사업장 주변… 백화점 명품 매출 두드러져
늘어난 소득은 빠르게 백화점 명품관으로 향했다. 올해 1월 1일부터 5월 25일까지 갤러리아 광교의 명품 매출은 전년 대비 13% 늘었고, 그중에서도 명품 보석·시계 매출은 46% 급증했다. ‘반세권(반도체 회사 인근 상권)’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판교·동탄·광교처럼 반도체 기업 사업장 주변 백화점의 명품 매출이 유독 두드러졌다.
수도권의 한 주요 백화점 관계자는 “반도체 사업장 인근 매장에서는 성과급 지급 시기와 맞물려 명품 시계나 보석류 같은 고가 라인업에 대한 구매 문의가 눈에 띄게 늘었다”며 “기존 VIP 고객층과 별개로 반도체 및 협력사 임직원을 중심으로 젊은 신규 고액 소비층이 확실히 형성된 분위기”라고 설명했다.
이는 주요 백화점의 실적에서도 확인된다. 롯데백화점의 상반기 매출(해외 포함)은 1조 7635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7% 늘었고, 영업이익은 3109억 원으로 59.4% 증가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상반기 매출이 1조 4794억원으로 14.9%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2167억 원으로 21.2% 늘었다. 현대백화점도 매출이 8.3% 늘어난 1조 2764억 원, 영업이익은 47.7% 증가한 2460억 원을 기록했다.

실적 개선을 이끈 것은 명품·패션 등 수익성이 높은 상품군과 외국인 소비였다. 신세계백화점의 상반기 명품 매출은 35%, 패션 매출은 10.1% 늘었다. 외국인 매출도 신세계가 120% 증가했고, 롯데백화점은 1분기 92%, 더현대 서울은 134% 늘었다. 성과급으로 불어난 소득이 소비심리 개선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 고가 소비로 연결되는 전형적인 자산효과의 흐름이다.
백화점발 온기는 단발성에 그치지 않고 하반기까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는 배경에는 반도체 양사의 실적 퍼레이스가 자리 잡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상반기 각각 약 146조 원대, 98조 1529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며 양사 합산 250조 원에 육박하는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HBM과 D램, 낸드플래시 등 주요 메모리 제품의 출하량이 늘고 가격이 가파르게 오른 결과다.

◇ 중국 쇼핑객들 일본 대신 한국 찾아… 명동과 강남 넘어 빠르게 확장
대규모 설비투자(CAPEX) 확대는 지역 상권과 내수 소비 여력을 장기적으로 떠받치는 버팀목이 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상반기에만 28조 1000억 원의 설비투자를 집행하며 평택캠퍼스 확장과 함께 용인·호남권 등에 신규 메모리 생산기지를 조성하고 있다.
SK하이닉스 역시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2기 팹(Y2)과 청주 M17 낸드 생산기지에 총 54조 원(각각 35조 2000억 원, 19조 10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확정했다. 이미 진행 중인 용인 1기 팹까지 더하면 반도체 벨트 전체의 투자 규모는 이보다 더 크다. 거대한 팹 증설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인력 유입과 협력사 생태계 활성화, 이에 따른 소득 증가가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 상권의 소비 여력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특수가 내부 소득이 만든 훈풍이라면, 또 하나의 축은 밖에서 들어왔다. 문화체육관광부 집계에 따르면 올해 6월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은 199만 3128명으로 전년 동월(161만9220명) 대비 23.1% 증가했다. 이에 힘입어 상반기 누적 방한 외국인은 1070만 9900명을 기록하며 견조한 성장세를 나타냈다.

6월 한 달간 중국이 64만 9582명(36.2% 증가)으로 가장 큰 비중과 증가율을 기록했고, 일본(34만 8216명, 21.3% 증가)과 대만(22만 3127명, 35.3% 증가)이 뒤를 이었다. 중국·일본·대만 세 나라 관광객을 합치면 122만 925명으로 전체 방한객의 61.3%에 달했다. 미주·구주·동남아 등 전 세계에서도 방한객이 늘면서 K관광 시장의 다변화도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중국과 일본 간 정치적 갈등의 영향으로 중국 쇼핑객들이 일본 대신 한국을 찾는 흐름도 감지된다.
이들의 소비 동선은 명동과 강남을 넘어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명동 상권 매출의 95%가 이미 외국인에게서 나온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다. CJ올리브영이 지난 3월 26일 서울 명동에 문을 연 ‘올리브영 센트럴 명동 타운’은 개점 한 달 만에 전체 매출과 외국인 매출 모두 기존 ‘올리브영 명동 타운’에 이어 2위에 오르며 올리브영 주요 매장 중 최상위권 매출을 기록했다.
새 매장이 문을 연 뒤 인근 다른 올리브영 매장의 외국인 매출도 전월 대비 11.5% 늘었다. 국적별로는 일본 관광객 매출이 74%, 중국 관광객 매출이 35% 각각 증가했다. K뷰티를 앞세운 H&B 스토어가 명동을 찾는 외국인들의 필수 코스로 자리 잡은 셈이다.

◇ 면세점 업계도 부진 벗어나… 상반기 외국인 면세점 매출 4조 9967억원
면세점 업계도 오랜 부진에서 벗어나는 모습이다. 상반기 외국인 면세점 매출은 4조 996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2% 늘었다. 지난해 상반기 전체 면세점 매출이 전년 대비 14% 급감하며 고전했던 것과 비교하면 뚜렷한 반등이다. 외국인 면세점 구매객 수는 664만 4924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29.4% 증가했다.
롯데면세점은 영업이익이 111% 늘어난 323억 원을 기록하며 5개 분기 연속 흑자를 이어갔고, 신라면세점은 영업이익 122억 원으로 흑자 전환했다. 신세계면세점도 매출이 5% 늘며 106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 흑자로 돌아섰다. 특히 롯데면세점의 1분기 외국인 개별 관광객 순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0% 증가했다.
중국(68% 증가)뿐 아니라 대만(38% 증가)과 베트남(255% 증가)까지 고객층이 다국적화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단체 관광객 중심이던 과거와 달리 개별 자유여행객이 소비의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신호다.

외국인 소비 동선이 넓어지면서 특수는 수도권을 넘어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연휴가 겹쳤던 지난 5월 초 황금연휴 기간, 대전·광주·전남 여수 등 비수도권 올리브영 거점 매장을 찾은 외국인 매출은 직전 주 대비 27% 늘었다.
특히 전남 지역 올리브영의 외국인 매출은 전주 대비 229% 급증했고, 1년 전과 비교하면 654% 폭증했다. 여수에 국제 크루즈 입항이 늘면서 중국·일본 관광객이 전남 지역까지 발걸음을 넓힌 결과다. 대전 ‘대전 타운’ 매장의 외국인 매출도 같은 기간 전주 대비 69% 성장했다. 명동과 홍대에 집중됐던 K뷰티 수요가 올리브영의 전국 오프라인 네트워크를 타고 지방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결과다.
부산은 이 흐름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지역이다. 올 상반기 부산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쓴 돈은 총 5914억원으로 전년 대비 63% 늘었다. 1~5월 부산 외국인 방문객은 725만명으로 전년 대비 44.9% 증가해 같은 기간 서울 방문객 증가율(27.3%)을 크게 웃돌았다.

부산 롯데백화점 본점의 외국인 매출은 같은 기간 125%, 신세계 센텀시티점은 226% 급증하며 전국 평균을 훌쩍 뛰어넘었다. 해운대 중동·우동의 해외카드 매출은 각각 81.8%, 73.2% 늘었고,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은 143.0%까지 치솟았다.
여기에 방탄소년단(BTS) 공연이 열린 연제구 일대의 소비까지 급증하며 이른바 ‘BTS노믹스’ 효과까지 더해졌다. 서울에 집중됐던 외국인 특수가 원화 약세와 지역 관광 콘텐츠를 매개로 지방 상권까지 낙수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뜻이다.

◇ K뷰티, 반짝 특수 넘어선다… 올리브영 국내 H&B 시장서 압도적 1위
이 영향은 오프라인 유통 채널로 곧바로 이어졌다. 호텔롯데는 2분기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17배 가까이 뛰었고, 상반기 누적 영업이익은 3배 이상(205.7% 증가)을 기록했다. 호텔 사업을 담당하는 롯데호텔앤리조트의 2분기 매출은 4172억 원으로 11.9% 늘었고, 영업이익은 320억 원으로 183.8% 증가하며 2분기 기준 사상 최대 실적을 냈다.
상반기 누적으로도 매출 7657억 원(12.9% 증가), 영업이익 576억 원(533.1% 증가)을 기록했다. 면세사업 역시 2분기 매출 9043억 원, 영업이익 319억 원으로 각각 35%, 385% 늘며 6개 분기 연속 흑자를 이어갔다. 실제 상반기 외국인 특수객의 객실 이용은 전년 대비 13.1%, 객실 매출은 13.5% 늘었다. 쇼핑에서 시작된 외국인 특수가 숙박과 관광이라는 연관 산업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흐름이다.
외국인 특수가 단순한 일회성 훈풍이 아니라는 근거도 있다. 올리브영은 국내 H&B 시장에서 압도적 1위 사업자로, 증권가에서는 올해 매출이 7조원대 안팎(전년 대비 26%대 성장)에 이를 것으로 전망한다. 오프라인 매장의 외국인 매출 비중도 지난해 상반기 처음 25%를 넘어 26.4%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2025년 1~5월) 방한 외국인 720만 6700명 중 596만 2700명이 올리브영에서 물건을 산 것으로 집계됐다.

방한 외국인 10명 중 8명이 올리브영을 거쳐 간 셈이다. 올해 외국인 유입이 그때보다 더 늘어난 만큼 이 비중은 더 커졌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아직 갱신된 수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회사 매출의 4분의 1 이상이 관광객 특수라는 단일 변수와 연결돼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올리브영은 이 흐름을 반짝 특수로 소비하는 대신 아예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국내에서 외국인 관광객을 통해 검증된 K뷰티 상품력을 해외 오프라인 매장으로 그대로 옮기겠다는 전략이다.
즉, 지금의 외국인 매출 급증이 국내 상권에 갇힌 낙수효과로 끝나지 않고 K뷰티 브랜드들의 해외 진출을 위한 실전 검증 무대 역할까지 겸하고 있는 셈이다. 이 지점이 반도체 성과급발 훈풍과 다른 점이다. 성과급은 한 번 지급되고 나면 소진되는 소득이지만, 외국인 관광객이 만든 K뷰티·패션 수요는 콘텐츠와 브랜드력이 뒷받침되는 한 반복해서 재생산될 수 있는 구조다.

◇ 백화점은 웃고, 마트는 운다… 마트, 2024년 2분기부터 9분기 연속 마이너스
다만 반도체와 외국인이라는 두 엔진은 유통계 전체를 고르게 데우지는 않았다. 오히려 채널 간 양극화를 뚜렷하게 갈랐다. 상반기 유통업체 매출은 전체적으로 7.3% 늘었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온도차가 확연하다. 백화점은 지난해 0.5% 성장에 그쳤던 데서 올해 20.1%로 고공성장했다. 반면 대형마트는 오히려 7.3% 역성장했다.
대형마트는 주력 상품인 식품군의 부진이 이어지며 2024년 2분기부터 9분기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 중이다. 온라인 장보기가 일상화되면서 대형마트의 전통적 경쟁력이던 식품 카테고리마저 흔들리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이 같은 양극화는 반도체·외국인 특수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성과급을 받은 이들이 향한 곳은 대형마트의 생필품 코너가 아니라 백화점 명품관이었고, 외국인 관광객이 지갑을 연 곳도 마트의 식품 매대가 아니라 면세점과 H&B 스토어, 백화점의 뷰티·패션 매장이었다. 대형마트의 주력 상품인 신선식품과 생필품은 애초에 성과급으로 소비를 크게 늘리거나 관광객이 여행 기념으로 사갈 만한 카테고리가 아니다.

여기에 온라인 새벽배송과 퀵커머스가 장보기 자체를 잠식하면서 마트는 반도체·외국인이라는 두 순풍을 하나도 타지 못한 채 구조적 역풍만 맞고 있는 처지다. 결국 지금의 유통업계 훈풍은 업계 전반에 걸친 회복이라기보다 고가·프리미엄 소비와 K뷰티·K패션 등 특정 카테고리에 집중된 반등에 가깝다.
대형마트 업계 관계자는 “성과급이나 환율 호재는 장바구니 물가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 마트 채널로까지 온기가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며 “고물가 속에서 장보기 수요는 온라인으로 이탈하는데 반도체나 외국인 특수의 수혜는 전혀 입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종합하면 현재 유통가에 불어넣는 훈풍은 확정 소득인 반도체 성과급과 변동성이 큰 관광객 유입, 그리고 자산 가격 변화에 따른 구매력 효과라는 서로 다른 엔진이 특정 유통 채널에 중첩된 결과다. 백화점과 면세점, H&B 스토어가 그 과실을 누리는 동안 대형마트를 비롯한 내수 업종은 여전히 역성장의 늪에 갇혀 있다.
두 엔진의 결정적 차이는 지속 가능성에 있다. 성과급은 이미 지급됐거나 지급이 약속된 돈이어서 소비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주가와 환율 등 시장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자산·구매력 효과는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연말 성과급 시즌과 관광 성수기가 겹치는 12월까지는 이 흐름이 이어질 가능성이 높지만, 최근 증시 급락이 보여주듯 그 기반 중 하나는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다.
성과급이라는 확정된 소득에만 기대는 채널은 반도체 업황이 꺾이는 순간 함께 흔들릴 수 있다. 반면 K뷰티·K패션처럼 외국인 관광객의 반복적인 재방문과 소비를 만들어내는 채널은 증시 등락과 무관하게 성장세를 이어갈 여지가 있다. 결국 유통업계의 연말 낙수효과가 일회성 특수로 끝날지, 지속 가능한 성장 축으로 안착할지는 가변적인 자산 효과를 넘어 실질적인 소득 증가와 K뷰티 등 구조적인 재방문 수요가 시장을 얼마나 견고하게 뒷받침하느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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