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리테일 산업의 ‘골든아워’가 흔들리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를 중심으로 한 중동 시장의 정세 불안 때문이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중동은 ‘포스트 차이나’의 가장 강력한 대안이자, K-푸드와 K-뷰티가 만개할 약속의 땅이었다.
그러나 최근 발발한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무력 충돌, 이른바 ‘작전명 에픽 퓨리(Epic Fury)’는 글로벌 물류의 핵심 동맥인 호르무즈 해협을 마비시키며 한국 기업들에 사상 초유의 ‘공급망 리셋’을 강요하고 있다. 애초 전쟁 초반만 해도 분위기는 달랐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이란 최고지도부와 군 지휘부를 잇달아 정조준하면서, 외부에선 ‘지도부 제거로 조기 종결 수순에 들어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실제로 이번 공습으로 이란 최고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사망이 보도됐고, 이후에도 알리 라리자니 국가안보 책임자, 골람레자 솔레이마니 바시즈 사령관 등 핵심 인사들이 추가로 타격받았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전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렀다. 이란 정권은 붕괴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슬람혁명수비대(IRGC)를 중심으로 지휘 체계를 재정비하며 항전 태세를 강화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보당국 평가를 인용해 이란 체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며, 강경파 중심으로 권력이 더 응집되고 있다고 전했다.
로이터도 해외 이란 반체제 인사들의 평가를 인용해, 지도부 제거와 공습만으로는 체제 전환이 어렵고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할수록 혁명수비대의 장악력이 강해질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은 실제로 이스라엘뿐 아니라 걸프 지역과 미군 관련 시설을 겨냥한 미사일·드론 보복을 이어가고 있다.

그 결과 이번 충돌은 ‘단기 참수 작전’이 아니라 최소 수주 이상 이어질 소모전으로 바뀌고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는다. 더 길어진 전쟁은 한국 기업들에는 더 나쁜 시나리오다. 표면적으로는 먼 나라의 무력 충돌처럼 보이지만,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고조와 유가·환율의 가파른 상승은 현지에 진출한 우리 기업의 수익성과 공급망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다.
문제는 또 있다. 유가가 뛰고 환율이 흔들리면 청구서는 한국의 매대와 물류센터, 백화점과 온라인몰로 곧장 날아든다. 더구나 지금의 한국 리테일은 단순히 국내 소비에만 기대는 산업이 아니다. 식품은 중동을 새 성장판으로 삼고 있고, 화장품은 미국과 유럽으로 뻗어 가는 길목마다 국제 운임과 원재료, 환율의 영향을 받는다.
백화점은 외국인 쇼핑 수요가 실적을 끌어올리는 구조로 바뀌고 있다. 중동 정세 불안이 ‘남의 일’이 아니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당장 가장 직접적인 충격은 에너지다. 이란이 봉쇄 조치를 진행하고 있는 호르무즈 해협은 세계 에너지 물동량의 핵심 통로다.
미국 에너지정보청에 따르면 이 해협을 지나는 원유와 석유제품 규모는 전 세계 해상 원유 거래의 4분의 1 이상, 세계 석유 소비의 약 5분의 1에 해당한다. 국제에너지기구도 2025년 기준 하루 약 2000만 배럴이 이 해협을 통과하고, 그중 80%가량이 아시아로 향한다고 짚는다.
LNG도 예외가 아니다. 글로벌 LNG 거래의 약 20%가 이 길목을 지난다.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는 중동 리스크가 곧 원가 리스크다. 문제는 이 충격이 단지 정유나 석유화학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유가가 오르면 먼저 운송비가 뛴다.
배에 기름이 더 들어가고 항공 화물 운임이 흔들린다. 물류비가 오르면 수입 원재료와 완제품 조달비가 함께 올라간다.

◇ 유가 상승이 연료비 부담과 물류 비용 상승…글로벌 공급망 빨간불
신한투자증권은 최근 보고서에서 “유가 상승이 연료비 부담과 물류 비용 상승 요인으로 작용하며, 인플레이션 우려가 커질수록 소비가 방어적인 영역으로 이동한다”고 분석했다. 소비 심리가 위축되면 비필수재부터 타격을 받는다. 한국 리테일 전반에 이중 압박이 걸리는 구조다.
이미 시장은 이러한 경로를 숫자로 반영하고 있다. 이란 전쟁 여파로 국제유가는 때때로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고 있다. 업계에선 전쟁이 장기화하면, 원유시장에 일시적 공급 부족이 나타날 수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하지 않고 원가와 물가를 자극하는 마찰적 충격만으로도 우리나라 기업 실적에는 충분히 부담이 된다.
한국은행도 같은 지점을 짚었다. 지난 2월 통화정책방향 자료에서 한은은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2.2%로 제시하면서 향후 물가 경로가 국제유가와 환율 움직임에 크게 영향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평소라면 진정 국면으로 보일 물가도 유가가 다시 뛰면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는 뜻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장바구니 부담이 커진다. 기업 입장에서는 가격 인상 여부를 놓고 고심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진퇴양난의 상황이다. 가격을 올리면 수요가 꺾일 수 있고, 버티면 마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국 유통업계가 가장 싫어하는 고민이다.

특히 식품업계는 지금 중동을 포기할 수 없는 시장으로 키워 왔다. 세계 이슬람 경제 보고서(SGIE)에 따르면 2023년 1조 4300억 달러였던 할랄 식품 시장은 2028년 1조 9,400억 달러까지 팽창할 전망이다. 할랄은 ‘허용된다’는 뜻의 아랍어로, 무슬림이 먹거나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의미한다.
식품의 경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생산·가공·유통된 제품에만 인증이 부여된다. 전 세계 할랄 식음료 전체 시장으로 범위를 넓히면 2028년 3조 2700억 달러라는 거대 시장이 형성된다. 지난해 중동 지역 K-푸드 수출은 4억 1160만 달러로 전년보다 22.6% 늘었다.
정부도 두바이 식품 박람회와 할랄 인증 협의 등을 통해 시장 확대를 밀고 있다. 올해 초엔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중동·아세안 등 유망시장 공략 행보에 나서기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순방은 지난해 12월 관계부처 합동으로 발표한 ‘글로벌 K-푸드 수출 전략(A-B-C-D-E)’의 후속 조치 성격으로, 중동과 아세안을 중심으로 유망 시장 진출 확대를 본격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A-B-C-D-E 수출 전략은 △찐 매력 제품 발굴·육성 △원스톱 애로 해소 △K-이니셔티브 융합 △디지털·기술 혁신 △중동 등 유망시장 진출 확대 등 5대 전략을 말한다.
송 장관은 UAE에서 암나 알 다하크 기후변화환경부 장관과 만나 양국 간 식량안보 강화를 위한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 중동 시장 겨냥해 대부분 할랄 인증을 받아 둔 라면업계도 비상
기업들 역시 이미 현지 파트너십을 촘촘히 깔아 놨다. 특히 CJ그룹은 그룹 차원에서 중동 시장에 전방위적인 공을 들여왔다. 이재현 CJ그룹 회장은 2024년 9월, 사우디아라비아 문화부의 초청으로 리야드를 방문해 사우디 국가개발계획 ‘비전 2030’을 주도하는 핵심 인사들과 연쇄 회동을 가졌다.
비전 2030은 경제 다각화와 엔터테인먼트·관광 등 소프트파워 육성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다. 이 회장은 당시 회담에서 CJ의 문화 산업 노하우와 사우디의 자원을 결합해 글로벌 시장에서 시너지를 낼 것을 강조하며, 현지 영화 제작 스튜디오인 ‘알울라 스튜디오’ 등을 둘러보기도 했다.
이러한 그룹의 전략적 방향성 아래 CJ제일제당은 중동 지역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UAE 기업 ‘알 카야트 인베스트먼츠(Al Khayyat Investments, AKI)’와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AKI는 UAE와 인근 중동 국가에 걸친 방대한 영업망을 바탕으로 200개가 넘는 글로벌 브랜드와 파트너십을 맺은 소비재 유통 강자다.
CJ제일제당은 이번 협약을 통해 비비고 볶음면 등 K-푸드 제품의 중동 판로를 확보하고, 비비고의 인지도를 활용해 이를 지역 주요 제품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CJ올리브영도 UAE 기반의 라이프헬스케어그룹과 협력해 유통망 확대에 나섰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이 공든 탑은 현실과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SPC그룹 역시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 생산 공장을 할랄(Halal) K-베이커리 허브로 삼아 중동 시장을 본격 공략 중이다. 파리바게뜨를 중심으로 사우디아라비아, UAE 등 현지 유력 기업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동남아를 거쳐 중동 전역으로 프리미엄 베이커리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라면업계는 더 예민하다. 중동 시장을 겨냥해 대부분 할랄 인증을 받아 뒀기 때문이다. 농심은 중동 지역 최근 5년 연평균 성장률이 12%에 달한다. 올해 목표는 더 공격적이다. 전년 대비 50% 이상 성장을 잡고 할랄 신라면에 더해 신라면툼바와 신라면김치볶음면까지 전면에 세웠다.

삼양식품도 중동 매출이 2024년 약 500억 원에서 2025년 약 660억 원 수준으로 커졌다. 이 회사는 2018년 아랍에미리트(UAE)의 할랄 인증을 취득한 뒤 2021년 현지 유통업체와 독점 공급 계약을 체결하면서 중동 시장에 본격적으로 진출했다. 현재는 UAE,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등 중동 10여 개국으로 판로를 넓혔다.
하지만 지금은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에 따라 오만 우회나 해상·육상 복합 운송까지 검토하는 상황이다. 매출이 늘수록 지정학 리스크 노출도도 함께 커진다. 이들 한국 식품기업이 받는 부담은 여럿이다. 하나는 수출 길 자체가 막히거나 가격이 상승하는 점이 문제다.
다른 하나는 국내 판매 가격 전략에도 혼선을 야기하고 있다. 수출 운임과 원재료비, 환율이 동시에 흔들리면 국내와 해외의 가격 정책을 따로 가져가기 어려워진다. 이익률이 높은 해외 시장을 지키려다 국내 판촉이 줄어들 수 있고, 반대로 내수를 방어하려다 해외 확대 속도가 늦어질 수도 있다.

◇ 뷰티 시장, 매출을 지키기 위한 판촉 부담도 커질 것으로 예상
화장품 업계 상황도 긴박하다.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Fortune Business Insights)에 따르면 글로벌 할랄 화장품 시장은 지난해 477억 6,000만 달러에서 2032년 1,150억 3,000만 달러까지 수직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K-뷰티는 비건·더마 기술력을 바탕으로 할랄 조건과 결합해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췄다.
고온건조한 기후에 맞춘 수분 충전과 자외선 차단 기능에 미백과 주름 개선까지 더해진 한국 제품은 중동 소비자들 사이에서 필수로 자리 잡았다. 이에 한국콜마와 코스맥스는 중동을 차세대 전략지로 낙점하고 공을 들여왔다. 한국콜마는 2022년 UAE 수출입 컨설팅 기관과 협력해 PB 상품 공급 체계를 구축했다.
코스맥스는 인도네시아 법인을 할랄 거점으로 삼아 전 세계 할랄 수요 시장을 공략해왔다. 에이피알도 지난 2024년 열린 ‘2024 두바이 뷰티 월드’에 참여해 현지 시장 내 브랜드 인지도 상승 및 다수의 계약 문의 등 성공적인 결과를 얻었다. 당시 에이피알을 포함해 국내 기업도 약 170여 개가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이러한 현지화 전략에 차질을 빚게 하고 있다. K-뷰티 브랜드를 전 세계에 유통하는 실리콘투의 경우도 중동 매출 비중이 10%에 달한다. 500개가 넘는 K-뷰티 브랜드를 취급하는 실리콘투의 중동 매출 비중이 높다는 것은 이 지역이 이미 K-뷰티의 핵심 영토임을 방증한다.
이러한 확장이 가능했던 건 결국 중동 지역의 안정적인 물류와 운임, 소비 심리 덕분이다. 중동 정세 불안이 길어지면 해상 운임과 보험료가 오르고 환율 변동성이 커진다. 이는 K-뷰티의 해외 확장 비용을 높이는 요인이다. 더 큰 문제는 소비다. 전쟁이 터졌다고 당장 립스틱 판매가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에너지 가격이 오르고 물가 불안 심리가 커지면 소비자는 먼저 지갑을 닫는다. 미국과 유럽의 리테일 기업들이 최근 생활필수품 가격 인하나 식료품 비중 확대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국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필수재가 아닌 품목일수록 할인 경쟁 압력이 세지고, 브랜드는 마케팅비를 더 써야 한다. 비용은 오르는데 매출을 지키기 위한 판촉 부담도 커지는 셈이다. K-뷰티가 세계적으로 잘 나간다고 해도, 유가와 전쟁이 만든 거센 바람까지 비껴 가기는 어렵다.

◇ K-리테일, 비용 압박 속…다시 비상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주목
중동 불안이 한국 리테일에 미치는 영향을 단순히 현지에 수출하는 기업에만 한정할 수 없다. 무엇보다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 물류와 보험, 원재료 가격과 환율이 동시에 자극받는다. 전쟁이 직접 이 품목을 때리지 않더라도, 에너지 가격이 전반적인 비용의 바닥을 밀어올린다.
유가 상승은 플라스틱 계열 포장재와 화학 원료 가격에도 시차를 두고 반영된다. 상대적으로 가격대가 촘촘한 소비재일수록 이런 비용 상승은 더 아프다. 몇백 원의 가격 조정만으로도 판매량이 민감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백화점이 처한 상황도 복합적이다.
현재 흐름만 보면 가장 좋아 보인다. 명품과 패션 회복, 외국인 매출 증가, 인바운드 효과가 한꺼번에 붙고 있다. 하지만 이 좋은 흐름이 국제 정세에 기대는 면도 무시할 수 없다. 유가가 높아지면 항공권과 여행 경비가 오르고, 이는 방한 관광객의 소비 여력에도 영향을 준다.
환율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중동 리스크가 커질 때 원화는 대체로 안전자산 선호 흐름에 밀려 약세 압력을 받기 쉽다. 원화 약세는 수출 기업엔 호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수입 원재료 비중이 높은 기업에는 비용 상승으로 더 먼저 반영된다. 특히 유통 기업은 해외 매출이 늘수록 구조가 복잡해진다.
환율이 급하게 흔들리면 헤지를 하지 못한 기업일수록 손익 변동성이 커진다. 소비 심리도 문제다. 고물가 국면이 길어질수록 상위 소비층은 백화점과 럭셔리 소비를 유지하지만, 중간층과 저가 소비층은 더 빠르게 지갑을 닫는다. 이 경우 대형마트와 편의점, 중저가 패션과 생활용품 쪽이 먼저 흔들린다.
이미 대형마트가 부진하고 편의점 성장도 둔화한 흐름은 이런 신호로 읽힌다. 전쟁이 직접 총수요를 무너뜨리지 않더라도 소비 구성의 균열을 더 깊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 유통업의 내부 격차가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 한국 리테일은 이미 글로벌 산업이다.
비비고와 신라면, 불닭, K-뷰티는 해외 매장과 온라인에서 함께 크고 있다. 서울 백화점은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 동선 안에 들어왔다. 이런 시대에 중동의 긴장은 한국 리테일의 바깥에 머물 수 없다. 전쟁은 멀리서 벌어져도 비용은 가까이서 청구된다. 남은 변수는 시간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단기적인 비용 상승은 고통스럽지만,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다져진 위기관리 능력이 향후 10년 K-리테일의 글로벌 경쟁력을 결정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회의 땅’ 중동에서 불어오는 모래폭풍을 뚫고, K-리테일이 다시 한번 비상할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대응 속도가 생존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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