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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봉의 40년, 상처 위에 다시 꽃피다…2027 S/S 서울패션위크 ‘REBLOOM’

하네스·테일러링·그래픽과 강렬한 레드 지나 꽃의 향연으로… 40년 디자인 현재 감각으로 재구성

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 런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색을 되찾았다. 블랙과 화이트, 차가운 블루가 지배하던 무대에 강렬한 레드가 등장하고, 마침내 초록과 분홍, 오렌지빛 꽃들이 화면과 의상을 뒤덮었다. 상처를 드러내고, 견디고, 다시 피어나는 과정이었다.

디자이너 이상봉이 9월 1일 오후 7시30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아트홀1관에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을 공개했다. 올해 데뷔 40주년을 맞은 이상봉은 자신의 디자인 아카이브를 단순히 회고하는 대신 지금의 시선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컬렉션을 관통하는 주제는 ‘상흔과 회복’이다. 전쟁이 이어지는 국제 정세와 AI가 불러온 급격한 변화 등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 상처 입은 인간이 어떻게 다시 일어서는가에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의 출발점에는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Frida Kahlo)가 있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절망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얼굴과 삶을 작품으로 남겼던 칼로의 태도를 이상봉 특유의 패션 언어로 옮겼다. 이번 컬렉션에서 꽃은 그래서 단순한 S/S 시즌의 낭만적인 장식이 아니다. 상처를 통과한 뒤 다시 피어나는 생명의 상징에 가깝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몸을 조이는 블랙 하네스…‘상흔’에서 시작된 런웨이
컬렉션 초반부는 긴장감이 강했다. 블랙을 중심으로 신체를 노출하고 구속하는 듯한 하네스와 벨트 디테일이 등장했다. 여러 개의 굵은 스트랩과 버클이 상체를 수평으로 가로지르고, 허리에는 커다란 원형 버클 벨트가 자리했다. 짧게 변형한 블랙 하의와 허벅지 위까지 올라오는 롱 레더 부츠가 결합하면서 룩은 거칠고 도발적인 인상을 남겼다.

목 중앙을 따라 이어진 메탈릭 장식과 얼굴·신체 곳곳에 새겨진 듯한 작은 그래픽 표현까지 더해지면서 인간의 몸 자체가 하나의 캔버스가 됐다. 아름다운 신체를 감추기보다 노출하면서 동시에 스트랩으로 속박하는 모순적인 구성은 이번 시즌이 이야기하는 ‘상처’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이후 분위기는 테일러링으로 전환됐다. 화이트 바탕에 블루 그래픽을 반복한 재킷과 쇼츠 셋업에는 셔츠와 타이를 매치했다. 클래식한 남성복 문법을 따르면서도 무릎을 드러내는 쇼츠와 화이트 부츠, 손을 감싼 글러브를 더해 익숙한 포멀웨어의 균형을 흔들었다.

블루 계열 셋업에서는 또 다른 이상봉식 테일러링이 나타났다. 짙은 블루 재킷과 와이드 팬츠에 반투명한 그레이 소재를 겹치고, 재킷의 스티치 라인을 의도적으로 노출했다. 반팔 케이프를 연상시키는 넓은 소매와 더블 브레스티드 구조, 길게 떨어지는 와이드 팬츠가 만나 남성복의 단단함과 유연한 볼륨을 동시에 만들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프리다 칼로가 그래픽으로 등장하다
컬렉션 중반부터 프리다 칼로는 더욱 직접적인 이미지로 런웨이에 등장했다. 블랙과 화이트를 비대칭으로 나눈 오버사이즈 드레스에는 칼로의 얼굴이 그래픽으로 배치됐다. 별다른 장식 없이 넉넉하게 떨어지는 실루엣과 거칠게 주름 잡힌 소재 위에 강렬한 인물 이미지 하나를 얹어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했다. 남성 룩에서도 블랙 셔츠와 화이트 아우터, 와이드 팬츠에 같은 모티브를 적용하면서 하나의 이미지를 남녀의 서로 다른 실루엣으로 변주했다.

또 다른 남성 룩에서는 프리다 칼로의 컬러 초상과 흑백 이미지를 콜라주한 그래픽 티셔츠가 등장했다. 블랙 와이드 팬츠와 단순하게 매치해 그래픽 자체를 전면에 세웠다. 예술 작품의 이미지를 의상에 그대로 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컬러 블로킹과 패치워크처럼 분할해 현대적인 스트리트웨어의 감각으로 옮긴 점이 눈에 띄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성별의 경계 역시 느슨했다. 남성과 여성에게 동일한 그래픽과 테일러링 코드를 적용하고, 쇼츠·와이드 팬츠·오버사이즈 셔츠와 재킷을 교차시켰다. 전통적인 남성복과 여성복의 구분보다는 하나의 이미지와 메시지를 어떤 신체 위에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에 집중한 모습이었다.

레드 레더가 바꾼 공기…상처가 에너지로 전환되다
중반 이후 런웨이에 선명한 레드가 등장하면서 분위기는 급격하게 달라졌다. 레드 레더 재킷과 미니스커트로 구성한 여성 룩은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 가운데 하나였다. 허리를 여러 개의 블랙 버클 스트랩으로 조이고 어깨를 날카롭게 확장해 신체의 윤곽을 갑옷처럼 만들었다. 상체에는 블랙 레더를 입체적으로 꼬아 만든 장식을 얹어 구조적인 볼륨을 강조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여기에 레드 앵클부츠와 조형적인 레드 아이웨어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같은 컬러로 연결했다. 특히 얼굴 양옆으로 뻗어 나가는 아이웨어의 유기적인 형태는 단순한 선글라스라기보다 오브제에 가까웠다. 초반부의 블랙 하네스가 억압과 상처를 암시했다면 이 룩의 레드는 그 에너지가 외부로 폭발하는 순간처럼 읽혔다.

반대로 블랙 맥시 드레스는 절제된 방식으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몸을 조이지 않고 바닥까지 풍성하게 떨어지는 실루엣에 깊게 파인 V넥을 적용하고, 네크라인을 따라 여러 겹의 블랙 비즈 장식을 드리웠다. 작은 블랙 헤드피스와 부츠를 더하면서 장례복을 연상시키는 엄숙함과 이브닝웨어의 우아함이 공존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그리고 꽃이 피었다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컬렉션의 메시지는 비로소 제목 ‘REBLOOM’과 직접 연결됐다. 그린을 바탕으로 레드·핑크·오렌지·화이트가 뒤섞인 플라워 프린트가 런웨이를 장악했다. 꽃의 형태를 정교하게 묘사하기보다 물감을 여러 번 겹쳐 칠한 듯 경계를 흐린 회화적인 표현이 특징이다.

남성 룩에서는 이 화려한 패턴을 재킷과 쇼츠, 슈즈까지 연결했다. 라임 그린 셔츠와 타이, 선명한 레드 칼라가 플라워 패턴 사이에서 다시 한번 강한 컬러 대비를 만들었다. 자칫 로맨틱하게 흐를 수 있는 꽃무늬를 박시한 재킷과 버뮤다 길이 팬츠에 적용하면서 젊고 경쾌한 남성복으로 전환했다.

평면의 프린트는 곧 입체적인 텍스처로 발전했다. 오프숄더 롱드레스에서는 수많은 실과 섬유 조각이 표면에서 솟아난 듯한 질감을 만들었다. 그린과 핑크, 레드, 화이트가 뒤섞인 소재가 모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면서 꽃밭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효과를 냈다. 머리에는 실제 꽃다발을 연상시키는 플라워 크라운을 올려 의상에서 시작된 꽃의 이미지를 얼굴까지 확장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코발트 블루의 밤 지나 거대한 꽃으로 완성된 피날레
화려한 플라워 룩 사이에서 깊은 코발트 블루 드레스도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한쪽 어깨에서 허리로 흐르는 비대칭 드레이핑과 풍성한 스커트가 빛을 받을 때마다 블루와 바이올렛 사이를 오갔다. 어깨와 허리에는 동일 계열의 입체적인 플라워 장식을 배치해 꽃이라는 주제를 색과 형태 모두에서 이어갔다.

그리고 피날레에서는 컬렉션 전체의 메시지가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됐다. 몸을 따라 밀착되는 미니드레스 위에 꽃잎처럼 솟아난 입체적 텍스처가 빼곡하게 자리하고, 그 아래로 같은 플라워 패턴의 롱스커트가 이어졌다. 머리를 뒤덮은 거대한 플라워 헤드피스와 모델 뒤에서 길게 펼쳐지는 베일 역시 같은 꽃무늬로 연결됐다.

특히 모델이 양손으로 펼친 긴 베일은 워킹에 따라 좌우로 크게 움직이며 마치 거대한 꽃잎이 열리는 것 같은 장면을 만들었다. 초반부 신체를 옥죄던 검은 스트랩과 버클이 피날레에서는 몸 밖으로 끝없이 확장되는 꽃과 베일로 바뀐 셈이다. 이번 쇼의 서사가 가장 명료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40년의 아카이브를 회고하지 않고 다시 움직이다
‘REBLOOM’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이상봉의 40년 헤리티지를 하나의 스타일로 규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픽, 프린트, 구조적인 테일러링, 오버사이즈 실루엣, 실험적인 레이어링, 아트와 패션의 결합 등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디자인 언어를 한 무대에서 다시 꺼냈지만 과거의 대표작을 나열하는 방식과는 거리를 뒀다.

슈즈 역시 룩의 성격에 따라 달라졌다. 블랙 롱부츠는 초반의 강한 하네스 스타일에 힘을 보탰고, 화이트 부츠는 그래픽 수트의 미래적인 분위기를 강조했다. 플라워 패턴 슈즈는 의상과 경계를 없애 토털 룩을 완성했으며, 레드 앵클부츠는 레더 미니 룩의 강렬한 색채를 발끝까지 밀어붙였다.

이상봉 리블룸
디자이너 이상봉이 데뷔 40주년을 맞아 1일 서울패션위크 무대에서 공개한 2027 S/S 컬렉션 ‘REBLOOM(리블룸)’.

무엇보다 블랙에서 화이트와 블루, 레드, 그리고 다채로운 플라워 컬러로 이동하는 색의 흐름이 쇼 전체의 서사를 이끌었다. 여기에 속박하듯 몸을 감싼 스트랩에서 유연한 테일러링으로, 평면적인 인물 그래픽에서 입체적인 꽃으로, 마지막에는 거대한 베일까지 확장되는 형태의 변화가 맞물렸다.

결국 이상봉이 2027 S/S 서울패션위크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40주년 기념 컬렉션’이 아니었다. 프리다 칼로가 자신의 상처를 예술로 전환했듯, 이상봉은 불안과 상흔을 옷의 언어로 받아들인 뒤 다시 색과 꽃으로 피워냈다.

40년을 지나 다시 피어난 이상봉의 꽃은 과거를 향해 있지 않았다. ‘REBLOOM’은 축적된 헤리티지가 박제된 유산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만나 다시 변화하고 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런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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