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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미러, 수트의 경계를 허물다…2027 S/S 서울패션위크 ‘SUIT:ABLE’

김주한 디자이너, 정제된 테일러링에 아웃도어 기능성 결합…‘입을 수 있는 수트’의 범위 확장

어둡게 가라앉은 런웨이 위로 화이트 셔츠와 블랙 팬츠를 입은 모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 보면 익숙한 셔츠와 팬츠의 조합이다. 하지만 셔츠에는 아웃도어 재킷을 연상시키는 입체적인 포켓이 붙었고, 팬츠의 볼륨과 길이는 전형적인 수트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었다. 클래식과 기능복의 경계가 흐려지는 순간이었다.

김주한 디자이너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데일리미러(DAILY MIRROR)가 9월 2일 오후 5시30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2027 S/S 서울패션위크를 통해 새 컬렉션 ‘SUIT:ABLE’을 공개했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데일리미러는 이번 컬렉션에서 그동안 다듬어온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아웃도어와 스포츠웨어의 기능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수트의 쓰임새와 착장 방식을 확장했다.(김주한 디자이너)

‘SUIT’와 ‘ABLE’을 결합한 이번 시즌 타이틀은 수트를 하나의 정형화된 옷으로 규정하지 않고 변화 가능한 시스템으로 바라보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데일리미러가 그동안 다듬어온 테일러링을 기반으로 아웃도어와 스포츠웨어의 기능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수트의 쓰임새와 착장 방식을 확장했다. 런웨이에서 그 의도는 명확했다. 재킷은 아노락이 되고, 셔츠는 유틸리티 아우터로 확장됐다. 수트 재킷은 미니드레스가 됐으며, 기능성 아우터는 스커트와 결합했다. 포멀과 캐주얼, 남성과 여성, 도심과 아웃도어 사이의 경계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방식이었다.

셔츠에 포켓을 달고, 재킷에는 기능을 입히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컬렉션 전반을 지배한 것은 블랙과 화이트였다. 강한 색이나 화려한 그래픽보다 실루엣과 디테일에 시선이 머물도록 한 선택이다. 화이트 오버사이즈 셔츠는 데일리미러가 이번 시즌 말하는 ‘SUIT:ABLE’을 압축적으로 보여줬다. 넓게 떨어지는 어깨와 긴 소매, 힙을 덮는 길이는 남성 셔츠의 여유로운 비례를 따르지만 가슴과 허리에는 플랩 포켓을 배치해 유틸리티 셔츠로 변형했다. 여기에 블랙 와이드 팬츠와 블랙 삭스, 광택 있는 슈즈, 구조적인 블랙 백을 매치했다. 눈을 가리는 슬림한 블랙 아이웨어까지 더하면서 단순한 모노톤 착장을 도시적인 이미지로 끌어올렸다.

남성 룩에서도 같은 접근법이 이어졌다. 화이트 셔츠 재킷에 허리를 가로지르는 스트링과 지퍼, 커다란 포켓을 배치하고 짧은 블랙 쇼츠와 스포츠 슈즈를 매치했다. 포멀 셔츠의 칼라와 아웃도어 재킷의 기능적인 구조가 한 벌 안에 공존했다.

특히 포켓은 이번 컬렉션에서 장식이 아닌 디자인의 핵심 요소로 활용됐다. 플랩 포켓과 패치 포켓을 전면으로 드러내고 위치와 크기를 변화시키면서 평면적인 셔츠와 재킷에 볼륨을 만들었다. 스트링과 지퍼, 스냅 버튼 같은 기능적 부자재도 곳곳에 노출했다. 소재 역시 경계를 섞었다. 경량 울과 기능성 코튼, 리 나일론(Li-Nylon) 등 서로 다른 성격의 소재를 사용해 테일러링 특유의 구조감과 스포츠·아웃도어웨어의 가벼운 움직임을 한 컬렉션 안에 담았다.

재킷이 미니드레스가 되고 아노락이 테일러링을 만났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이번 쇼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여성복의 실루엣이었다. 블랙 유틸리티 재킷은 쇼츠와 함께 착용해 하의를 거의 드러내지 않는 짧은 비례를 만들었다. 넉넉한 어깨와 네 개의 입체적인 포켓이 상체에 볼륨을 집중시키는 반면 다리는 과감하게 노출했다. 여기에 화이트 삭스와 블랙 스포츠 슈즈를 매치해 재킷이 가진 묵직함을 가볍게 풀어냈다.

블랙 슬리브리스 미니 룩에서는 아웃도어 장비의 디테일을 보다 직접적으로 끌어왔다. 한쪽 어깨를 감싸는 넓은 스트랩과 버클, 전면의 지퍼가 드레스의 장식이 됐다. 목을 감싸는 하이넥과 비대칭 숄더가 몸의 선을 강조하는 가운데 블랙 바이저와 스포츠 샌들, 화이트 삭스를 더했다. 여성적인 미니 실루엣과 테크니컬 기어의 조합이 예상 밖의 긴장감을 만들었다.

반대로 화이트 더블 브레스티드 재킷은 수트 자체를 드레스로 변환했다. 허리를 잡아주는 구조적인 실루엣과 길게 떨어뜨린 벨트 디테일, 날카로운 라펠이 클래식한 테일러링을 유지하면서도 맨다리를 드러내는 길이로 여성적인 비례를 만들었다. 작은 화이트 백과 화이트 삭스, 묵직한 블랙 슈즈를 더해 단정함과 캐주얼함을 한 착장 안에 공존시켰다. 이러한 스타일링은 수트를 재킷과 팬츠의 조합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데일리미러가 말하는 ‘수트’는 셔츠와 쇼츠가 될 수도, 미니드레스와 아노락이 될 수도 있었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블랙과 화이트 사이를 가른 ‘일렉트릭 블루’
절제된 모노톤 사이에서 등장한 강렬한 블루는 런웨이의 흐름을 단숨에 바꿨다. 선명한 일렉트릭 블루 아노락은 이번 시즌의 기능적 성격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낸 룩이다. 넓은 스탠드 칼라와 가슴을 수평으로 가르는 플랩, 큼직한 캥거루 포켓, 볼륨을 살린 슬리브가 전형적인 아웃도어웨어의 요소를 보여줬다.

그러나 하의는 예상과 달랐다. 그레이 미니스커트를 레이어링하고 한쪽에서 긴 패널을 바닥 가까이 떨어뜨렸다. 상체의 실용적인 아노락과 하체의 비대칭적인 드레이핑이 충돌하면서 기능복을 패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화이트 삭스에 날렵한 블랙 슈즈를 매치한 것도 스포츠웨어 일변도로 흐르지 않게 균형을 잡았다.

블랙·화이트·아이보리를 기본으로 블루를 강한 포인트로 사용한 컬러 구성은 ‘도시와 아웃도어의 공존’이라는 컬렉션의 성격을 효과적으로 보여줬다. 보도자료에서 제시한 베이지와 카키까지 더해 전체적으로 자연에서 가져온 실용적인 색과 도시적인 무채색의 관계를 설정했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겹치고 열고 조인다…옷의 구조 자체가 스타일링
화이트 룩에서는 레이어링의 실험이 두드러졌다. 후드 아우터를 여러 층으로 분리한 듯한 룩은 크롭트 톱과 중간 길이 아우터, 비대칭으로 길게 떨어지는 하단 패널을 겹쳐 하나의 옷처럼 구성했다.

지퍼를 열어 다리를 노출하고, 스냅 버튼과 드로스트링을 그대로 드러냈다. 정면에서는 하나의 롱 아우터처럼 보이지만 모델이 움직일 때마다 서로 다른 길이의 패널이 분리돼 흔들리면서 실루엣이 계속 달라졌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또 다른 화이트 룩은 하이넥 아우터의 허리 부분에 대형 포켓을 좌우로 배치하고 중앙을 벨트처럼 연결했다. 짧은 하의와 화이트 삭스, 기능성 스포츠 슈즈를 같은 톤으로 통일해 수트보다는 테크니컬 유니폼에 가까운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번 컬렉션에서 ‘기능’은 숨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포켓과 버클, 스트링, 지퍼를 의도적으로 밖으로 꺼내 디자인 요소로 삼았다. 옷을 여닫고 조이고 수납하기 위해 존재했던 장치가 실루엣을 만드는 조형 언어가 된 셈이다.

롱 테일 재킷으로 돌아온 ‘수트’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쇼 후반에는 데일리미러의 출발점인 테일러링이 다시 강하게 부각됐다. 두 모델이 나란히 등장한 블랙 룩은 이번 컬렉션에서 가장 극적인 수트 스타일을 보여줬다. 넓고 각진 어깨, 더블 브레스티드 구조, 여러 겹의 플랩 포켓은 클래식한 남성 수트의 힘을 유지하면서도 재킷 뒤와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패널을 통해 전혀 다른 실루엣을 만들었다.

앞에서는 미니드레스처럼 다리를 드러내지만 뒤로는 코트에 가까운 긴 자락이 따라왔다. 모델이 걸을 때마다 패널이 크게 흔들리며 정적인 테일러링에 움직임을 부여했다. 같은 블랙이라도 매트한 부분과 은은하게 빛을 반사하는 소재가 교차해 검은 런웨이 위에서 옷의 구조가 더욱 또렷하게 살아났다.

슈즈는 날렵한 블랙 펌프로 전환됐다. 앞서 등장한 스포츠 슈즈와 샌들, 삭스 스타일링과 달리 전통적인 여성 슈즈를 배치하면서 한 컬렉션 안에서도 수트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스포츠 슈즈부터 펌프스까지…액세서리도 경계를 넘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슈즈와 액세서리 역시 ‘테일러드와 아웃도어의 경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러닝화와 트레킹 슈즈를 연상시키는 기능성 슈즈, 스트랩 샌들, 광택 있는 클래식 슈즈와 여성적인 펌프스가 한 런웨이에 함께 등장했다. 특히 화이트 삭스를 스포츠 슈즈뿐 아니라 포멀한 블랙 슈즈에도 반복적으로 매치해 서로 다른 스타일을 연결했다.

가방은 0914와의 협업으로 완성했다. 블랙과 화이트를 중심으로 한 컴팩트한 백은 의상과 색을 맞추면서도 구조적인 형태로 포인트를 줬다. 아이웨어도 눈길을 끌었다. 김주한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 협업한 KIMMMM 아이웨어는 눈을 가릴 정도로 가늘고 어두운 선글라스부터 얼굴 전면에 걸쳐지는 바이저 형태까지 다양하게 등장했다. 단순한 액세서리를 넘어 모델의 표정과 이미지를 통제하며 데일리미러가 설정한 미래적인 도시인의 캐릭터를 강화했다. 다이텍연구원과 케이랩스가 3D 프린팅 기술로 개발을 지원한 로고와 액세서리 역시 이번 시즌의 테크니컬한 방향성과 맞닿았다.

‘SUIT:ABLE’, 수트보다 ‘입는 방식’을 디자인하다

데일리미러 SUIT ABLE
김주한 디자이너의 데일리미러 2027 S/S 서울패션위크 컬렉션 ‘SUIT:ABLE’.

김주한이 이번 시즌 흥미롭게 보여준 것은 수트의 형태 자체보다 ‘수트를 어떻게 입을 것인가’에 대한 변화였다. 재킷과 셔츠의 어깨·라펠·칼라처럼 익숙한 테일러링의 흔적은 유지했다. 대신 길이를 줄이거나 늘리고, 포켓을 밖으로 끌어내고, 스트링과 버클을 결합하고, 아노락과 스포츠 슈즈를 섞었다. 여성복과 남성복의 요소 역시 자연스럽게 교차했다.

결과적으로 런웨이에 등장한 것은 전통적인 의미의 ‘수트 컬렉션’이라기보다 도시에서 움직이고 일하고 이동하는 사람을 위한 새로운 유니폼에 가까웠다. 포멀웨어의 정제된 외형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아웃도어웨어가 가진 움직임과 기능성을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SUIT:ABLE’이라는 이름도 설득력을 얻었다.

서울에서 시작된 이 실험은 해외로 이어진다. 데일리미러는 서울패션위크에 이어 9월 밀라노 패션위크에 참여할 예정이며 홍콩 센터스테이지, 상해 패션위크, 유라시아 패션위크 등으로 활동 무대를 확대할 계획이다.

어둠 속 런웨이 끝에서 김주한 디자이너가 모습을 드러내자 객석의 휴대전화 화면들이 일제히 켜졌다. 이날 그가 보여준 수트에는 정답이 없었다. 입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재킷이 아노락으로, 셔츠가 아우터로, 수트가 드레스로 변할 수 있다는 것. 데일리미러의 2027 S/S ‘SUIT:ABLE’은 결국 ‘수트란 무엇인가’보다 ‘수트는 어디까지 가능해질 수 있는가’를 묻는 컬렉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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