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화된 고물가 체제와 소비 양극화가 국내 리테일 산업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면서도 확실한 가치를 추구하는 ‘불황형 가치소비’가 정착하면서 의류 소비의 중심축이 SPA로 급격히 이동하는 추세다.
이 과정에서 ‘노재팬’ 여파를 딛고 역대 최대 실적에 근접한 유니클로가 압도적인 1위 자리를 공고히 하는 가운데, 내실 경영으로 전략을 전환한 탑텐과 온라인 플랫폼 강점을 무기로 오프라인 영토를 빠르게 확장 중인 무신사스탠다드(무탠다드)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유통업계는 단순한 저가 의류 판매 경쟁을 넘어, 디자인·소재 차별화, 디지털 공급망 관리, 온·오프라인 유통 채널 구축 역량이 결합한 고도의 리테일 구조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최근 1~2년간 국내 유통 시장을 관통한 가장 큰 변수는 공급망 비용 상승과 내수 침체의 동시 발생이다. 원자재 가격 및 인건비 상승으로 기성 패션 브랜드들이 변화를 늦추자, 이를 체감한 소비자들이 고품질과 합리적 가격을 동시에 제공하는 대형 SPA 브랜드로 대거 이동하기 시작했다.

대형 쇼핑몰과 교외형 타운 등 유통 채널 역시 집객력을 잃어가는 중소형 브랜드 대신, 확실한 고객 유입 효과를 보장하는 대형 SPA 매장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현재의 SPA 시장 활황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소비자의 구매력 변화와 유통사의 공간 효율화 전략이 맞물려 나타난 구조적 필연의 결과다.
효율·볼륨·플랫폼, 3사 3색의 리테일 전략 구조
현재 국내 SPA 시장의 격전은 각기 다른 사업 모델과 유통 구조를 가진 세 기업의 전략적 지향점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유니클로를 전개하는 에프알엘코리아는 2025 회계연도(2024년 9월~2025년 8월) 기준 국내 130여개 매장에서 매출 1조3,524억 원, 영업이익 2,704억 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각각 27.5%, 81.6%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영업이익률도 20%대를 회복했다.
이는 역대 최대 실적이었던 2019 회계연도(1조3,781억 원)에 근접한 수치로, 노재팬·코로나19 여파로 6,000억 원대까지 급감했던 매출이 사실상 완전 회복 궤도에 올라선 것으로 평가된다. 부실 매장 철수와 대형 매장 중심의 리뉴얼, 그리고 히트텍·에어리즘 등 기본 아이템의 기능성 강화를 통한 고효율 공급망 구조 확립이 독주 체제의 핵심 동력이다.

신성통상의 탑텐은 최근 전략의 무게중심을 공격적 외형 확장에서 내실 경영으로 이동시키고 있다. 탑텐 단독 매출은 FY2024(2024년 7월~2025년 6월) 기준 약 9,4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지나, 신성통상 패션사업부 전체 실적은 2022~2023 회계연도를 정점으로 하향세로 전환됐다. 가장 최근인 2025년 7~12월(반기) 패션사업부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5% 감소했다.
다만 같은 기간 생산 물량을 23% 줄이는 강도 높은 비용 통제를 통해 영업이익은 오히려 7.7% 증가시키며 수익성 방어에 성공했다. 현재 탑텐의 오프라인 매장 수는 약 357개점(탑텐키즈 제외)으로, 중소 도시·복합쇼핑몰 중심의 유통망 강화와 ‘텐텐데이’ 같은 대규모 정기 이벤트를 통한 이익 효율 운영에 중점을 두고, 신규 출점을 병행하지만 상권별 매장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는 방향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모습이다.
유니클로의 뒤를 무서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쫓는 곳은 무신사스탠다드다. 온라인 패션 플랫폼의 PB(자체 브랜드)로 출발한 무신사스탠다드는 2025년 누적 거래액 4,700억 원을 달성하며 전년 대비 약 40%의 고성장을 기록했다.

특히 오프라인 거래액이 전년 대비 약 86% 신장하며 전체 실적을 견인했는데, 2026년 5월 기준 전국 40개 매장을 운영 중이며, 연내 20개 이상의 신규 매장을 추가해 60호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온라인의 방대한 데이터와 오프라인의 경험 소비를 결합한 O4O(Online for Offline) 전략의 모범 사례로 꼽히며, 2026년에는 연간 거래액 1조 원 달성을 목표로 내걸었다.
유통 플랫폼의 헤게모니 변화와 글로벌 확장
이들의 3파전은 유통 플랫폼 시장의 주도권 변화로 이어진다. 대형 쇼핑몰과 주요 상권, 교외형 타운에서 SPA 브랜드의 위상은 ‘전체 상권 활성화와 고객 집객을 견인하는 핵심 테넌트’로 격상됐다. 무신사스탠다드의 명동점·한남점·성수점 등은 방한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쇼핑 코스로 자리잡으며 외국인 매출 비중이 명동점 55%, 한남점 44%, 성수점 42%에 달하는 등 내수 브랜드를 넘어 K-패션의 글로벌 관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내 오프라인 매장의 순수 외국인 매출 합계는 2025년 기준 150억 원을 돌파했다. 이에 힘입어 무신사스탠다드는 2025년 12월 중국 상하이에 첫 해외 단독 매장을 개점한 데 이어 2026년 상반기 2호점을 추가 오픈하는 등 현재 4개점을 운영 중이다. 중장기적으로 중국 내 10개점 확보, 2030년까지 해외 100개점을 목표로 글로벌 확장을 본격화하고 있다. 나아가 글로벌 온라인 스토어(전 세계 13개 지역) 기준 무신사스탠다드의 2025년 거래액은 전년 대비 162% 성장했다.
국내 SPA 시장은 향후 단순한 가격 경쟁을 넘어 ‘누가 더 정교한 디지털 공급망을 갖추고 오프라인 공간을 효율적으로 지배하는가’의 싸움으로 전개될 전망이다. 유니클로가 높은 영업이익률을 바탕으로 프리미엄 라인업 확장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탑텐의 내실화 전략과 무신사스탠다드의 데이터 기반 공격적 확장 전략이 시장의 파이를 어떻게 나누어 가질지가 핵심 관전 포인트다. 브랜드와 제조사 관점에서는 트렌디한 상품을 빠르게 내놓는 기획력을 넘어, 소재와 디자인 차별화, 온·오프라인을 활용한 유통 채널 구축 역량이 생존을 가르는 핵심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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