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형 유통업계와 이커머스 플랫폼이 신선 농산물을 조달하는 방식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도매시장 경매나 벤더사를 거쳐 규격화된 상품을 단순 매입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유통사가 직접 농업 생산 현장에 개입해 품질 관리 기준을 심고 재배 기술과 온·오프라인 판로를 패키지로 지원하는 형태가 표준으로 안착하는 모습이다.
이상기후로 인한 작황 변동성이 일상화되고 장바구니 물가 안정이 유통 채널의 집객력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떠오르면서, 산지 생산자와의 수직적 결속력을 높여 품질 편차와 가격 불안을 동시에 통제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유통 채널이 산지 생산자 관리에 직접 자원을 투입하는 배경에는 신선식품 조달 환경의 급격한 악화가 자리 잡고 있다. 폭염, 폭우 등 이상기후로 인해 농산물 생산량이 급등락하고 계절별 품질 유지 리스크가 커지면서 기존의 단순 위탁 매입 방식은 한계에 직면했다. 물량 부족 시기에는 납품 단가가 치솟아 마진율이 훼손되고, 품질 편차로 인한 소비자 클레임은 플랫폼과 유통 브랜드 전반의 신뢰도를 깎아먹는 결과를 낳았다.
이에 유통 대기업들은 신선 농산물을 단순한 범용 상품(Commodity)이 아닌, 제조 공정에 준하는 정밀 관리가 필요한 핵심 자산으로 재정의하기 시작했다. 산지의 생산 환경과 수확 후 관리 기술이 매장 매대나 배송 박스에 담기는 최종 품질을 결정한다는 판단 아래, 농가와 공급사를 자체 공급망 안으로 끌어들여 품질 노하우를 이식하고 안정적인 매입 물량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위험을 분산시키고 있다.

설명회부터 팝업스토어까지… 기술과 판로를 결합한 산지 관리 전략
이러한 공급망 고도화는 이커머스 자체브랜드(PB)와 대형 오프라인 유통사의 현장 지원 데이터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쿠팡의 PB 전문 자회사 씨피엘비(CPLB)는 2026년 10월 27일 서울 구의 오피스에서 채소와 과일을 공급하는 중소 협력사 81개사를 초청해 ‘2026년 공급사 농산물 품질 설명회’를 열었다.
2024년부터 3년째 이어지는 이 행사에는 기존 및 신규 협력사 관계자 105명과 임직원을 포함해 120여 명이 참석했으며, 계절별 농산물 품질관리 방안과 고객 피드백 기반의 불량 개선 사례, 품질 이슈 예방 및 대응 노하우가 집중적으로 공유됐다.
씨피엘비 파트너사 10곳 중 9곳은 중소 제조사로, 이들이 판매하는 수만 개 품목은 전체 PB 상품 매출의 90% 이상을 책임진다. 이날 우수 협력사로 감사패를 받은 나들농업회사법인의 경우 쿠팡과 협력해 규격화된 품질 관리 체계를 도입한 이후 안정적인 전국 판로를 확보하며 매출이 50% 이상 성장하는 성과를 거뒀다. 유통사가 직접 품질 가이드라인을 제공해 폐기율을 낮추고, 중소 생산자는 고정된 납품처를 확보해 시설 투자를 이어가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된 셈이다.
오프라인 대형마트 역시 단순 납품 거래를 넘어 농가 인큐베이팅과 현장 판매를 연계하며 산지 접점을 넓히고 있다. 롯데마트·슈퍼는 10월 7일까지 제타플렉스 잠실점 야외 행사장에서 청년농부 6명이 참여하는 ‘저탄소·친환경 청년농부 팝업스토어’를 운영했다. 이들은 지난 3월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및 환경재단과 체결한 상생협약에 따라 5월 친환경 농업 및 온라인 직거래 교육을 수료하고 8월에는 바이오차 비료를 지원받은 농가들이다.

롯데마트·슈퍼는 교육과 생산 자재 지원을 거친 청년농부들에게 유동 인구가 집중되는 잠실점 매대를 열어주고 바질페스토, 토마토, 저탄소 먹골배, 단호박 말랭이 등의 직접 판매를 지원했다. 현장 시식회와 퀴즈 이벤트를 통해 친환경 가치를 알리는 동시에, 농가에는 오프라인 소비자와 직접 만나 시장 반응을 검증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를 제공했다. 재배 기술 교육부터 친환경 자재 보급, 대형 점포 팝업을 통한 최종 판로 연결까지 이어지는 종합 육성 모델을 가동한 결과다.
산지와의 직접적인 기술·판로 결합은 유통업계의 수익성과 재고 운용 전반에 구조적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도매 중간상을 거치지 않는 산지 직결형 조달은 불필요한 마통 비용을 줄여 고물가 속에서도 가격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진 여력을 제공한다. 또한 사전 품질 협의를 거친 농산물은 운송 및 보관 과정에서의 감모율과 폐기율을 현저히 낮춰 유통사의 물류 효율을 극대화한다.
나아가 산지 직소싱과 PB 농산물은 e커머스와 대형마트 간의 가격 출혈 경쟁을 방어하는 독점적 무기로 작용한다. 공산품과 달리 품질 편차가 심한 농산물 영역에서 일관된 신선도와 당도를 보장하는 브랜드는 충성 고객을 묶어두는 강력한 락인(Lock-in) 장치가 되기 때문이다.
향후 리테일 시장에서는 매대에서 벌어지는 단기적인 가격 할인 경쟁보다 1차 산지에서 얼마나 탄탄한 협력 인프라를 확보하고 있느냐가 신선식품의 승패를 가를 전망이다. 유통사와 브랜드 운영사는 단순히 물건을 사들이는 바이어의 역할에 머물지 않고, 데이터 기반의 품질 관리 시스템과 친환경 재배 인프라를 산지에 선제적으로 이식하는 공급망 파트너로 진화해야만 기후 위기 속에서도 안정적인 생존 기반을 다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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