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그룹은 승계구도의 밑그림을 그려 놨다. 아직 실행단계는 아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김승연 한화 회장이 2021년 그룹 경영에 공식 복귀한 뒤 여전히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김승연 회장이 언제든 물러나더라도 큰 잡음 없이 승계 작업이 가능하도록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재계에선 김승연 회장의 아들 3형제가 그룹 사업을 방산·에너지, 금융, 리조트 등 3개 부문으로 갈라 승계하는 방식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8월 장남인 김동관 한화솔루션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이런 밑그림이 구체화했다.
김동관 부회장은 한화 전략부문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략부문 대표를 맡았다. 김 부회장한테 지주회사(한화)를 비롯해 주력 사업인 방산(한화에어로스페이스)과 태양광(한화솔루션)을 모두 맡긴 셈이다. 이렇게 되면 한화생명 등 금융 부문은 차남인 김동원 한화생명 부사장이 거머쥘 가능성이 높다.
나머지 호텔·리조트·백화점 사업은 3남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무가 맡는 식이다. 올해 2월 한화솔루션이 백화점 사업부인 갤러리아 부문의 인적분할을 확정하면서 이런 해석에 힘을 더하고 있다.
한화솔루션의 리테일 사업부문은 오는 3월 31일 한화갤러리아 주식회사로 재상장된다. 김동선 한화호텔앤드리조트 전무가 갤러리아 경영 전반을 맡을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김동선 전무는 한화갤러리아 부문의 신사업전략실장을 겸임하고 있다. 한화갤러리아가 분할되면서 지위가 달라진다.
한화갤러리아는 현재 한화솔루션의 자회사이자 지주회사인 한화의 손자회사다. ‘한화→한화 솔루션→한화갤러리아’로 이어지는 지배구조를 갖추고 있다.
분할이 완료되면 한화갤러리아는 한화의 손자회사에서 자회사로 승격된다. 인적분할은 기존 회사의 주주는 신설·존속회사 지분을 모두 확보하는 방식이다. 사업 성격이 다른 한화솔루션과 한화갤러리아가 모두 한화의 자회사가 되면 향후 삼형제가 그룹을 나눠 승계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해진다.
이 때문에 국내 유통업계는 김동선 전무의 경영 행보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경영 방식에 한화그룹 유통사업의 미래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일단 현재 시점의 한화그룹 유통사업의 존재감은 두드러지는 상황은 아니다. 주력 사업인 백화점 사업이 최근 실적이 반등하긴 했지만, 경쟁사와 견줘보면 신통치 않은 실적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 빅3에 밀린 아쉬운 갤러리아 성적표
지난해 한화솔루션의 갤러리아부문은 매출 5327억원, 영업이익 373억원을 올렸다. 전년보다 매출은 3.6%, 영업이익은 29.1% 증가한 수치였다. 겉으론 건실한 실적을 낸 듯 보인다. 그런데 백화점 ‘빅3’와 비교하면 마냥 손뼉만 칠 성적표는 아니다.
롯데백화점은 지난해 전 카테고리가 골고루 신장하면서 매출은 3조232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1.9% 증가했다. 영업이익은 4980억원으로 42.9% 신장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해 매출액이 2조4869억원으로 전년 대비 16.4% 늘었고, 영업이익도 5018억원으로 38.5% 증가했다. 창립 이래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현대백화점은 매출 2조2896억원, 영업이익은 3788억원으로 전년 대비 각각 8.9%, 24.3% 증가했다. 이 역시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이다. 매출과 이익 규모뿐만 아니라 성장세 역시 ‘빅3’가 한화보다 훨씬 더 앞질렀다.
이들 3사가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경신하면서 약진하는 사이, 갤러리아는 아직 팬데믹 이전 수준의 실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갤러리아의 지난해 매출(5327억원)은 아직 2018년(6636억원),2019년(5936억원)을 밑돌고 있다.
개별 매장을 따져 봐도 갤러리아의 경쟁력이 강하다고 보기 어렵다. 지난해 국내 5대 백화점 70개 점포 매출 순위에서 ‘갤러리아 명품관’이 8위에 랭크된 게 가장 높은 순위였다. 갤러리아 타임월드점, 갤러리아 광교점은 각각 16위, 20위에 머물렀다. 나머지 매출 상위권 매장은 모두 빅3가 차지했다.

한화 유통 사업의 또다른 축인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실적도 못 미덥긴 마찬가지다. 이 회사는 2019년부터 ‘적자의 늪’에 빠졌다. 매출 6486억원, 영업손실 251억원으로 직전년도 100억원대 영업이익을 기록해 놓곤 다음해 곧 바로 적자로 전환됐다. 2020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확산하면서 더 큰 타격을 입었다. 952억원에 달하는 손실을 기록했다. 2021년엔 적자 규모를 521억원으로 줄이긴 했지만, 햇수로 치면 4년째 적자경영이 이어진 만큼 재무 부담이 상당했다.
몸집도 줄어들었다. 한화호텔앤드리조트는 2016년만해도 1조원이 넘는 매출을 구가하던 회사였다. 오랜 업력, 전국 지역 기반, 지속적인 리뉴얼을 통해 콘도 업계 2위의 시장 지위를 확보하고 있지만 시장 영향력이 과거보단 많이 후퇴한 상황이다. 다행히 지난해 3분기 누적 매출액 5401억원, 영업이익 115억원을 기록하면서 흑자 전환엔 성공했다. 하지만 그간 쌓인 적자에 따른 부담을 해결했다고 보긴 어렵다.

김동선 전무 입장에선 이런 난관을 빠르게 타개해야 한다. 김 전무가 유통사업 전반에서 적극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는 점은 긍정적이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10월 성사시킨 미국 3대 버거 브랜드 ‘파이브 가이즈’의 국내 도입이다. 김 전무는 이 브랜드 도입을 위한 초기 기획부터 계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사업 추진의 전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파이브가이즈는 1986년 미국 버지니아에서 시작한 햄버거 브랜드다. 미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버거 설문에서 만족도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미국에서 가장 사랑 받는 버거로 알려져 있다.
◇ 파이브가이즈ㆍ이베리코 등 신사업 준비로 종횡무진

파이브가이즈가 미국인으로부터 사랑받는 가장 큰 이유는 맛 때문이다. 파이브가이즈 매장 주방에는 냉동고, 타이머, 전자레인지가 없다. 모든 음식은 주문과 함께 신선한 재료로 조리된다. 매일 직접 만드는 패티와 생감자를 썰어 순수한 땅콩 기름에 튀겨내는 감자튀김 등 차별화한 품질의 메뉴를 맛볼 수 있다는 게 특징이다. 특히 프렌치 프라이는 미국 아이다호 주에서 가져오는 양질의 감자를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미국 현지의 맛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걸 중요 조건으로 내세우는 파이브가이즈는 한국 진출을 두고도 고개를 갸웃했는데, 김 전무가 직접 설득에 나서며 유치에 성공했다는 후문이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 2월엔 자신의 SNS에 ‘열일 중’이라는 문구와 함께 미국 파이브가이즈 매장을 둘러보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파이브가이즈가 아시아 지역에 진출한 건 홍콩·싱가포르·중국·말레이시아에 이어 한국이 5번째다. 국내 첫 매장은 올 상반기 오픈 예정이며 앞으로 5년간 국내에 15개 이상 매장을 열 계획이다. 파이브가이즈는 강남 지역 1호 가두점을 시작으로 갤러리아 백화점 등 다양한 장소에서 국내 고객을 맞을 계획이다.
또한 김 전무는 올해 초 한화가 운영하는 스페인 이베리코 농장을 통해 ‘친환경 순종 이베리코’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갤러리아에 따르면 김 전무는 올해 1월 스페인 세비아 북부 시에라 모레나 국립공원 내 이베리코 농장을 방문했다. 이 농장은 한화가 직접 운영하고 있는데, 김 전무가 농장을 방문한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여기서 사육 중인 돼지는 100% 순종 이베리코 흑돼지로 도토리를 먹여 방목한 최상위 베요타 등급이다. 스페인에서 생산되는 이베리코 중 베요타 등급은 전체의 7% 가량에 불과하며 스페인 이베리코협회 (ASICI)의 인증을 받아야 한다.
갤러리아는 올 하반기 이곳에서 생산된 프리미엄 이베리코를 활용한 다양한 상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이는 ‘건강한 프리미엄 먹거리’를 국내시장에 적극 들여오겠다는 김 전무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다.

김동선 전무는 저명한 기업인과 경제학자, 저널리스트, 정치인 등이 모여 세계 경제에 대해 토론하고 연구하는 국제민간회의인 다보스포럼에도 얼굴을 내비쳤다. 글로벌 유통기업 경영진과 신흥국 기업인을 만나 비즈니스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베인앤드컴퍼니 등 글로벌 컨설팅업체 관계자들과 경영전략을 고민하는 시간도 가졌다. 또한 지난해 5월 한화그룹이 한화호텔앤드리조트의 승마사업 부문을 물적분할해 한화넥스트를 설립한 것도 승마선수로 활약한 김동선 전무의 강점을 잘 살리기 위함으로 읽힌다. 승마를 통한 관광·레저 사업을 더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다만 김 전무는 전문적인 경력을 쌓아온 김동관 부회장과 김동원 사장과 달리, 경영 경력이 짧다는 점은 약점으로 지적된다. 따라서 그가 한화 유통사업에서 어떤 신사업을, 어떻게 펼칠지 주목받고 있다.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삼남으로 태어난 김동선 전무는 승마 명문으로 알려진 미국 태프트 스쿨과 다트머스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이후 승마선수로 눈에 띄는 성과를 냈다.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 17살의 나이로 출전해 아시안게임 승마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 기록을 경신했다.
첫 금메달을 딴 이후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2014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승마 마장마술 단체 부문 금메달을 획득했다. 3관왕 자리에 오른 그는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는 개인 마장마술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이어 2014년 한화건설에 입사했다. 그러나 2017년 초 불미스러운 사건의 중심에 서며 퇴사했고, 독일에서 종마·요식업 등 개인 사업을 펼치다 귀국했다. 이어 사모펀드(PEF) 운용사 스카이레이크에 잠시 몸을 담았지만 몇 달 뒤 2020년 말 한화에너지에 상무보로 재입사 후 한화호텔앤드 리조트로 자리를 옮긴 상황이다.
곧이어 2021년 5월 한화호텔앤드리조트 호스피탈리티 부문 미래전략실 상무로 발령 났으며, 지난해 2월에는 갤러리아 부문 신사업전략실장에도 함께 이름을 올렸다. 또 지난해 10월 1년 5개월 만에 한화호텔앤 드리조트의 전무로 승진했고, 갤러리아 부문 전략 본부장에도 임명됐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김동선 전무가 최근 공격적인 경영 행보로 그룹 내 유통·레저 분야에서 입지를 확고히 하면서 재계는 앞으로의 김 전무의 역할론을 두고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김 전무가 SNS도 활발히 하는 소통형 경영인으로 보이는 데다 개인적으로 서울 종로구에 일식당 스기모토를 운영하는 등 그동안 식품·외식업에 높은 관심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유통 업계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