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리테일 업계가 스테이블코인으로 들썩이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논의가 본격화되자, 유통사·카드사·핀테크가 동시에 움직이면서다.

최근 쿠팡은 미국 핀테크 기업 스트라이프 등이 주도하는 블록체인 ‘템포(Tempo)’의 초기 파트너로 합류했다. 템포는 스테이블코인 결제에 최적화된 블록체인으로, 파트너 명단에는 비자, 도이체방크, 스탠다드차타드 등 글로벌 금융사들도 이름을 올렸다.

국내에서는 롯데그룹의 소비자 멤버십과 간편 결제 서비스를 운영하는 롯데멤버스가 최근 LPAYKRW, KRWLPAY, LPKRW 등 총 24건의 원화 스테이블 코인 관련 상표권을 출원했다.

(사진=형지그룹)
패션그룹 형지 계열 형지글로벌은 자체 간편결제 시스템 ‘형지페이’를 개발하며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회사는 전국 2000여 개 매장과 600만 고객을 연결해 그룹 전체의 통합 결제 플랫폼으로 키운다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 IT 전문 인력을 영입해 우선 매장에 ‘형지페이’를 적용하고, 법제화가 이뤄지면 스테이블코인 ‘형지코인’과 연계할 계획이다. 금융권과의 협업도 추진 중이다.

한국 유통회사만 스테이블코인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최대 유통 체인 월마트와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이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해 은행과 신용카드에 기반한 전통적인 결제 시스템을 대체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월마트, 아마존과 같은 거대 유통·전자상거래업체가 스테이블코인을 사용할 경우 다른 경쟁사들도 뒤따라 활용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이름 그대로 ‘안정적인 코인’이다. 비트코인처럼 가격이 널뛰는 자산이 아니라, 달러·유로 같은 법정화폐나 금과 같은 실물자산에 가치를 1:1로 고정한다. 달러에 연동된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1코인이 1달러의 가치를 유지한다. 그래서 투자보다는 결제와 송금 같은 실생활 영역에서 법정화폐처럼 쓰일 수 있다.
◇ 미국 경우, 지니어스법 통과시켜…발행 절차, 공시 의무 등 명시
미국은 지니어스법을 통과시켜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에 편입했다. 지니어스법은 스테이블코인의 법적 정의, 발행 절차, 공시 의무 등을 명시하며, 기업이 이를 발행할 경우 미 달러나 단기 국채 같은 유동성 자산을 1:1 비율로 보유하도록 규정했다.
이 법안은 연방 차원의 첫 가상화폐 규제 법안이자,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법제화한 세계 첫 사례다. 명확한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스테이블코인 사용을 제도적으로 촉진하겠다는 취지다. 발행사는 미국 국채를 준비자산으로 묶어야 하며, 이를 통해 국채 수요를 끌어올리는 효과도 얻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제도화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발행 논의가 탄력을 받았다. 이재명 정부가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하려는 입장은 조금 다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서 활성화되면 원화 생태계가 약화될 수 있기 때문에 ‘원화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방파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발행 자격을 은행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창용 한은 총재는 국회에서 “비은행까지 허용하면 금융 구조에 예기치 못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반면 국회 일각과 업계에서는 글로벌 경쟁과 혁신을 고려해 다양한 사업자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이자 지급 여부도 뜨거운 논쟁거리다. 이자를 허용할 경우 사실상 은행 예금과 다를 바 없다는 우려와, 시장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하다는 반론이 맞서고 있다. 일부 법안은 전면 금지를 명시했고, 다른 안은 허용 가능성을 열어두며 제도 설계의 여지를 남겼다.

외화 스테이블코인 규제도 쟁점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더라도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의 파급력은 여전하다. 외국인 노동자의 송금이나 무역 결제 수요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테더 같은 역외 발행사가 법망을 피해 유통되는 현실은 금융안정을 위협할 수 있다. 최근 발의된 일부 법안은 일정 요건을 충족해야 국내 유통을 허용한다는 조항을 담았지만, 국회 내에서는 해외 발행사에 국내 지점 설치를 의무화하는 수준에 그친 안도 존재한다.
이미 금융 인프라를 갖춘 시중은행들도 스테이블코인 대응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신한은행은 배달앱 ‘땡겨요’에 스테이블코인을 적용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단순 결제를 넘어 리워드 지급, 가맹점 정산까지 활용 범위를 넓혀 실제 주문과 정산이 가능한지 따져보는 단계다. 농협은행은 최근 뮤직카우·아톤과 손잡고 스테이블코인과 토큰증권(STO)을 결합한 모델을 검증한다.
K-콘텐츠 저작권 기반 STO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붙여 해외 팬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시나리오다. KB금융은 그룹 차원 ‘가상자산 대응 협의체’를 운영 중이며, 최근에는 ‘스테이블코인 분과’를 상설 조직으로 전환했다. 하나은행은 디지털전략사업부 내 전담 인력을 두고 관련 정책과 트렌드를 분석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디지털 자산팀’을 꾸려 다수의 상표권을 출원하고 기술 검증을 진행 중이다.
◇ 유통업계가 노리는 기회일 수 있지만…도입까지는 ‘산 넘어 산’
국내 유통업계가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준비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조만간 제도적 판이 깔릴텐데, 그때 뒤처지면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게 될 수 있어서다.
특히 결제 수수료를 고려하면 스테이블코인은 유통업체에 상당히 매력적이다. 카드 결제는 밴(VAN)·PG·카드사·은행을 거친다. 1~2초 만에 끝나지만, 그 사이 여러 단계의 중개 수수료가 붙는다. 미국의 카드 수수료는 대략 1.5~3.5%다. 국내도 1.6~2.2%가 일반적이다. 조 단위 매출을 올리는 유통사에 1%포인트는 영업이익을 뒤집는 숫자다.

반면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지갑↔지갑’으로 정산한다. 카드망·교환수수료가 필요 없다. 처리 수수료도 줄어든다. 실시간 정산으로 현금흐름이 빨라진다. 납품 대금 회전이 빠른 유통업에 치명적 강점이다.
글로벌 연결성도 매력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USDC·USDT 등)은 이미 ‘디지털 달러’처럼 쓰인다. 국경 간 송금은 수초, 수분이다. 환전·영업일 제약이 없다. 인바운드 관광객이 지갑 하나로 결제하고, 리워드는 본국에서도 쓰는 그림이 가능하다. 해외 직구·역직구를 잇는 결제 링크가 자연스럽게 열린다.
장점은 또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결제·정산의 데이터가 온전히 ‘내 플랫폼’에 남는다. 외부 카드망이 가져가던 세부 로그가 사라진다. 포인트, 쿠폰, 선불충전과 코인을 통합 설계하면 락인 효과가 커진다. 스타벅스식 선불 모델이 확대되는 배경이다. 무신사는 ‘무신사머니’로 충전 생태계를 키우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이 제도권에 들어오면 충전 한도·자금 운용의 제약이 풀린다. 결제는 더 빠르고, 보상은 더 정교해진다. 유통의 본질은 고객 데이터와 멤버십이라는 걸 고려하면 외면하기 힘든 매력이다.
물론 실제로 스테이블코인이 도입되고, 사람들의 일상을 바꿀 때까진 시간이 걸릴 공산이 크다. 바꿔야 할 습관과 넘을 산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신뢰 문제가 걸림돌이다.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는 준비자산이 만든다. 1:1 담보, 일일 공시, 상시 환매가 핵심이다. 발행사가 흔들리면 코인도 흔들린다.
선례도 있다. 일주일 만에 50조원이 증발한 2022년 테라·루나 붕괴가 스테이블코인을 ‘안정된 화폐’가 아닌 ‘불안정한 사적 화폐’로 각인시켰다. 도입되더라도 규제는 더 엄격해야 한다. 자금세탁방지(AML), 고객자산 보호, 환불·취소·차지백과 같은 소비자 보호 절차가 제도에 박혀야 한다.
고객의 습관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한국 결제는 이미 빠르고 싸다. 소비자가 굳이 바꿔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결제와 송금이 압도적으로 편리해야 하고, 효과를 확실한 체감해야 한다. 이게 담보되지 않으면 업계가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해도 쓰이지 않을 수 있다.
더구나 결제는 공공재에 가까운 기능이다. 민간 플랫폼이 다루더라도 그 기반엔 신뢰할 수 있는 공적 인프라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스테이블코인 논의는 ‘민간 발행-민간 관리-민간 운영’에 책임을 넘겨주는 구조다. 그나마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기축통화 위상에 기대고 있지만,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글로벌 사용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다.
만약 이러한 난관을 넘고 스테이블코인이 시장에 정착한다면, 그땐 단순한 결제 수단으로 보기 어렵다. 유통 산업의 운영체계가 될 가능성이 크다. 수수료를 줄이고, 정산을 즉시화하고, 멤버십을 재설계할 수 있다. 국경을 넘는 상거래를 기본값으로 만든다.
제도화가 정교해질수록, 기업들은 이득을 보는 구조다. 수익성을 개선하고 글로벌 고객의 편의를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시작하는 이 설계 싸움에서, 누가 인프라를 쥐느냐가 한국 유통의 다음 10년을 좌우할지도 모른다.